제자훈련
가남감리교회 제자훈련
10단원 사랑으로 사는 사람
1. 사랑이 제일인가?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오늘날 세상은 교회 다니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말쟁이’라고 부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물에 빠져도 입이 물 위로 동동 뜰 것이기 때문에 죽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언젠간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얼굴이 붉어진 적이 있습니다. 두 명의 승객이 큰 소리로 싸우고 있었는데 보다 못한 어느 할아버지가 그들을 향해 이런 호통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왜 여기서 싸우는 거야? 여기가 교회인 줄 알아?”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말만 잘하는 싸움꾼으로 여기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잘못 살아왔음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구원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서 보고 싶어 하고 또한 반드시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사랑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신자들의 삶 속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항상 있어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으뜸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바로 그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앞 단원에서 우리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모두 다 믿음과 소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입만 열면 사랑을 외치는 우리에게도 사랑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사랑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 안에 사랑이 있는지 분별하는 기준은 우리가 사랑을 제일로 여기고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Q. 여러분은 사랑이 제일이라고 여기고 사십니까?
교회 임원을 세울 때 성경적인 기준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무엇보다도 강조하셨던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보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말씀하셨고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셨는데 그 사랑이 교회 안에서 너무 가볍게 여겨지곤 합니다. 주일 성수, 십일조 헌금, 교회 봉사 등을 잘하면 임원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임원들과 함께 아무리 애를 써도 예수님의 교회는 세워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심사숙고해서 직분을 맡긴다고 해도 그들이 교회를 일으키기는커녕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원인은 처음부터 임원을 세우는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Q. 빌립보서 4:2을 읽고 대답해 보십시오.
1.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사람은 빌립보교회 안에서 어느 만큼 비중있는 사람이었겠습니까?
2.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추측해 보십시오.
3. 우리 교회 안에서 당신과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는 교우는 없습니까?
4. 만약 당신과 마음이 불편한 교인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요, 초대 빌립보교회를 충성스럽게 받들던 성도였고 훌륭한 전도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여인은 교회 안에서 심히 사이가 나빴습니다. 교회의 충성스러운 일꾼이요, 훌륭한 전도자였지만 정작 두 사람 사이는 만나기를 싫어하고, 서로 미워하고,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빌립보교회가 만난 큰 시험이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비단 유오디아와 순두게만이 겪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충분히 찾아올 수 있는 일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인간적인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점을 잘 이용합니다. 그래서 성도 사이에서 미움과 다툼, 분열, 질투심, 경쟁심, 갈등 등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열의 소식을 듣고 매우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빌롭보교회에 편지를 쓸 때 이 문제를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Q. 다음 질문을 읽고 답을 써보십시오.
1.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따 먹지 말라고 한 열매는 무엇입니까?
(창세기 2장 9절, 17절, 3장 6절)
2.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이 왜 그렇게 큰 죄가 됩니까?
3. 만약 어떤 사람이 어른이 되고도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여, 매번 하나님께 선악의 여부를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리겠습니까?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에 옳고 그른 것을 매우 중요하게 따집니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옳은 일과 옳은 생각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계실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모세는 젊은 시절,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심하게 때리는 것을 보고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동족애와 사명감을 느겼습니다. 그래서 “내 동족을 이대로 둘 수 없다. 나만 왕궁에서 잘 살 수는 없다.”면서 과감히 노예생활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다가 애굽 사람을 때려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히브리 사람끼리 싸우는 것을 말리는 과정에서 “네가 언제부터 우리 재판관이 되었소?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우리를 죽이려고 그러오?”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모세는 갑자기 덜컥 겁이 나 그 자리를 피해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왜 실패했습니까?
그는 자기 생각에 옳은 것만 생각하였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끝까지 받는 것을 소홀히 여겼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한번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옳은 생각을 가지고, 일을 옳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니까? 바로 평안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일에 대하여 쉽게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타락한 증거입니다.
우리의 판단이 부정확함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판단하기 때문에 인간관계는 깨지고 서로 상처를 입히고 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적 눈이 뜨여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능력이 강해집니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 안에 주님의 사랑이 없으면 그것 때문에 무서운 사람이 되고 맙니다.
바리새인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천대받던 세리와 창녀조차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가장 경건하고 의롭게 산다고 자랑하던 바리새인을 저주하고 버리신 까닭은 그들이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만 하지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임원 수련회를 갔습니다. 도착한 날 저녁에 세미나를 마치고 나서 참석자들에게 숙소를 정해주었습니다. 다음 날은 새벽부터 일정이 잡혀 있었기에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잠자리에 들지 않았습니다. 방마다 불이 켜져 있고 서로 모여 앉아서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교우들이 나눈 대화를 이랬습니다. 김 권사님과 박 권사님이 모이면 최 권사님 이야기를 하고, 최 권사님과 박 권사님이 모이면 김 권사님 이야기를 하고, 장로님끼리 모이면 목사님 이야기를 하고, 권사님끼리 모이면 장로님 이야기를 하는 식이었습니다.
결국 일찍 자기를 틀렸다고 생각한 목사님은 아예 대화 주제를 정해주었습니다.
“교회부흥, 속회부흥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세요.”
그랬더니 5분도 안 되어서 “그만 잡시다”하며 방마다 불이 꺼졌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하여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을 물어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옳아 보여도 사실은 잘못된 일이 많고, 잘못된 것처럼 보여도 깊은 사정을 알고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른 것만 따지다 보면 서로 죽이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에서 우리는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지기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서로 하나가 되고 , 살려 주고, 사랑하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릴 적에 집안이 너무 어려워서 창녀촌으로 팔려간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곳에도 순정은 있는 법입니다. 자매님은 어떤 청년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날 자신들의 어둠을 스스로의 힘으로 걷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창녀촌을 탈출해 아무도 자기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도시로 가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자매님이 창녀촌에서 지낼 때 가장 부러웠던 것은 주일에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발품을 팔아 교회에 찾아 등록을 했습니다. 부부를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겼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모두 집사가 되었습니다. 부부는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행복한 삶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는지 같은 교회에 다니는 어느 집사님이 자매의 과거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신실해 보이는 자매가 그렇게 더러운 과거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정말 가증스러워. 어쩜 자기의 더러운 과거를 그토록 감쪽같이 속일 수 있을까? 이건 당신만 알아야 해. 정말 기막힌 일이야”하며 다른 교인에게 전해준 귓속말은 그들 부부만 모르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말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들 부부는 교인들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느꼈습니다. 전에 그토록 친절하고 따뜻했던 교유들이 자기들만 나타나면 마치 벌레 보듯이 힐끔거리며 자리를 피했습니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알 수 있었습니다. 모든 교우가 자기들의 과거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은 안타까웠습니다. 자신들의 불행한 과거는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아픔이지 교인들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인들에게 다가가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교인들은 그들을 피해 달아나기에 바빴습니다.
창녀촌보다 더 싸늘한 교회에서 그들 부부는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결국 어느 날 밤 부부는 수면제를 나눠 먹고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잠을 청하고 말았습니다.
젊은 부부 집사의 느닷없는 죽음 앞에서 담임목사님은 가슴을 치며 울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제가 양 떼를 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리 떼를 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내가 속한 교회에서 일어난다면 우리는 그 내외를 품어줄 수 있을까요? 사랑이 제일이라고 여긴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제일이라고 여기고 있지 않다면 우리도 그 내외를 더운 사람이라 여기며 소문내고 배척할 것입니다.
2. 사랑이 구원의 조건인가?
요한일서 3장 14절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사도 요한은 흔히 ‘사랑의 사도’라고 불립니다. 그가 쓴 복음서와 서신들 곳곳에 사랑을 강조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Q. 요한일서 3:14에 우리가 영생을 얻는 조건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구원에 이른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교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구절 앞에서 고민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초를 둔 모든 기독교 교리는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인 것은 우리가 아무런 다른 조건 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여기에서 느닷없이 구원의 조건으로 사랑을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바울이 그렇게도 엄중하게 질책했던 ‘다른 복음(갈 1:7)’을 전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요한이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요한은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누구 못지않게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요한복음에서는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을 말합니다.
Q. 요한복음 5:24에서는 영생 얻는 조건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기에서 요한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하는 것은 요한일서에 나오는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다(요일 3:14).”는 표현과 동일한 말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표현은 곧 “구원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즉 그는 여기에서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 요한은 처음에는 “우리는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말했다가 나중에는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말했던 것일까요? 그동안에 그의 사상이 바뀌었던 것일까요? 단언하건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의 사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는 방식과 단어를 바꿨을 뿐입니다.
오순절 사건 이후 여러 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런 교회를 향해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그분의 구속(救贖)의 은혜를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을 믿는다는 것은 곧 죄인을 사랑하셔서 자녀로 삼아주신 주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Q. 요한일서 3:16에는 우리가 어떻게 참사랑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까?
어느 목사님의 아들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매우 엄격한 아버지는 거짓말하는 아들에게 매를 들었는데, 매가 열 대가 되고 점점 늘어나 백 대까지 때리게 되었습니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때렸지만 아이도 울고, 때린 아버지도 울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목사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항상 잘했니? 네가 잘못했을 때마다 네게 매를 댔다면 너는 어떻게 되었겠니?”
그제야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의 복음이 마음 깊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또 거짓말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탕자를 위하여 잔치를 베푸신 아버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온 집 안에 풍선을 달고 장신을 하고 ‘웰컴’하고 써 붙이고 파티 준비를 했습니다. 아들은 ‘오늘은 진짜 죽었다.’고 생각하며 집에 들어왔는데 잔치 분위기라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안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알 것 같았습니다.
아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래도 목사님은 계속하여 사랑을 표현하고 고백하고 때린 것에 대하여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변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제껏 해보지 않던 농담을 걸어왔습니다. 목사님은 비로소 이 아이가 자신을 아버지로 여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모든 교인에게 적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십자가의 복음을 깨달은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믿었다면 그 사랑 때문에 자기 역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마땅했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말을 “사랑함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말로 바꿔 쓴 것입니다. 그에게 믿음은 사랑과 동의어였던 것입니다.
어느 자매님은 함께 자취하는 친구의 생활이 무질서하여 마음이 늘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끼던 필통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마음이 어찌나 속상한지 하루 종일 찾고 또 찾다가 하나님께 기도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네가 요나와 같다. 필통 하나 잃어버린 것은 그렇게 아까워하면서, 네 룸메이트는 왜 그렇게 싫어하느냐? 그 영혼이 필통보다 못하다는 말이냐?”
저는 사도 요한의 고민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늘 안타깝고 답답해하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가치와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닌데, 실제로 우리는 사랑을 철저하게 무시합니다.
한번은 큰 회사의 대표이사가 교회에 등록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교회에 등록하기 전에 저와 면담하기를 청하여 기쁜 마음으로 만날 날짜를 잡았습니다. 약속한 날 저녁에 저는 약속 장소인 호텔 커피숍을 향해 차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고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도대체 제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그러자 불현 듯 제 마음에 한 여성도님이 떠올랐습니다. 그 성도님은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나마 교회에도 나오다 말다 하는 소위 부진한 신자였습니다.
그는 시장에서 옷가게를 했는데 최근에 부도를 내고 경제사범 신세가 되어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심방 전도사를 통해 그 소식을 들었지만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로 너무 바빠서 면회를 가지 못했습니다.
여성도를 면회하고 온 심방 전도사님은 제게 그의 딱한 사정을 보고했습니다. 가족과 친척이 함께 투자해서 사업을 벌였는데 막상 부도가 나자 모든 책임을 그가 혼자 뒤집어쓰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안쓰러운 것은 가족 중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정을 듣고는 언제 시간 내서 한 번 더 찾아가보고 교인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하라고 전도사에게 지시했습니다. 순간 주님이 제가 이렇게 책망하시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너는 회사 대표이사를 만나는 일에는 시간을 그렇게 잘 내면서 그 여성도를 면회 갈 시간은 없느냐.”
정말 두려웠습니다. 마태복음25장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대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25:41~43).”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차별하고 있음을 회개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미 약속시간이 다 되었고, 시간이 저녁때인지라 다음 날 아침에 면회를 가겠다고 주께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여성도님이 수감되어 있는 구치소를 찾아갔습니다. 그녀는 저를 보자마자 펑펑 눈물을 쏟아내며 면회 시간이 다 가도록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습니다. 결국 저는 교도관에게 부탁해 간신히 면회 시간을 조금 연장하고 함께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면회하고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그녀는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만약 제가 그날 그분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저는 평생 마음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인데 사랑이 없는 것은, 예수님이 아직 그에게는 주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Q.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3.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
마태복음 22장 37~4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은 분명한데, 사랑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직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사시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Q. 마태복음 22:37~40을 읽고 두 가지 큰 계명을 써 보십시오.
우리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사랑의 열매를 맺는 데는 대략 다음 세 단계를 거칩니다.
첫째, 자기 자신 안에 사랑이 없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실제로 우리 자아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입니다. 우리는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면 깊은 곳을 살펴보면 자식조차도 자신을 위해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부활> 등 불후의 명작을 남긴 러시아의 대문호입니다. 그는 작품마다 기독교의 숭고한 사랑에 대하여 썼고, 읽는 사람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켰지만, 정작 자신의 아내와는 관계가 대단히 불행했습니다. 결국 그는 가출하여 어느 시골 역에서 쓸쓸히 죽었습니다.
미국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민주주의의 아버지요, 미국 민주주의 헌법을 기초한 사람이지만, 평생 흑인을 노예로 부렸던 사람입니다.
둘째, 사랑하게 해 달라고 몸부림치며 기도하게 하십니다.
오로지 나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자아의 실상이 감추어져 있다가 그대로 드러나면 큰 좌절을 겪게 됩니다. 그러면 몸부림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자신에 대한 절망의 과정을 거치면 비로소 우리의 옛 사람이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온전히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었던 내가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이제 사는 것은 예수님의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하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가 사랑입니다.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이며 진짜 예수 믿는 것입니다.
지금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있스니까? 이렇게 고백해보십시오.
“주님, 저는 죽었습니다! 주님, 맺힌 마음을 풀지 못하는 저는 죽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옹졸한 저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Q. 다음 질문을 읽고 답을 써보십시오.
1.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말하거나 불평한 적이 없습니까?
2. 혹시 가족 중에나, 교우들 중에 도무지 용납하기 어려운 이가 있습니까?
3. 만약에 그렇다면 십자가의 사랑으로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시고,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4. 사랑과 축복의 원리
마태복음 7장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사랑하라는 말은 손해 보거나 바보처럼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받는 모든 복과 평안과 응답이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믿음의 역사가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용서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조건 용서하려고 하기 전에 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Q. 누가복음 17장 1~6절과 마태복음 18장 21~22절을 읽고 답해 보십시오.
1. 누가복음 17장 3절에서 예수님은 어떤 교훈을 가르치셨습니까?
2. 마태복음 18장 21절에서 베드로는 어떤 질문을 하였습니까?
3.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4.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잘못할 때 몇 번이나 용서하십니까?
5. 이 말씀에 대하여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6. 즉각 순종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하는 마음을 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구했을 때 예수님께서 좀 엉뚱하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하신 것은, 지금은 믿음을 따질 때가 아니라 순종할 때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했는데, 이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애인이 생겼을 때, 사랑한다는 말을 일곱 번 하리이까?”
“아름다운 자연을 볼 때, 아름답다고 일곱 번 하리이까?”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일곱 번 하리이까?”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일곱 번 하리이까?”
이런 질문들이 어리석은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용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에 “나는 더 이상 용서할 수 없어!”, “벌써 몇 번인지 아세요?” 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자신도 다시는 죄 짓지 않아야 합니다.
Q. 여러분이 믿기만 하면 산이 옮겨지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 믿음을 어디에 사용하겠습니까?
만약 당신에게 기적을 행하는 믿음이 있다면, 그 기적을 영혼 구원과 용서하고 사랑하는 데만 사용하겠습니까? 혹시 아무 필요도 없이 산이나 뽕나무를 바다로 옮기지는 않겠습니까? 원수의 머리 위에 벼락을 내리게 하지는 않겠습니까?
엘리사는 자기를 조롱하는 마흔 두 명의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라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왕하 2:23~24)
예수님은 칼을 들고 종의 귀를 잘라버린 베드로에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선하고 온전한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 장애인 선교단체에서 여간사님이 자기소개를 하는데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신에게는 날카로운 분석력과 분명한 판단력, 그리고 깔끔하고 정확한 계산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유능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디서나 유능하다고 인정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적인 소개는 그녀에게 모자란 듯 넉넉한 푼수 같은 웃음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만일 자신에게 날카로운 분석력, 분명한 판단력, 깔끔한 계산력만 있었다면, 외롭고 소외된 이들이 도무지 위로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푼수 같은 웃음을 가지게 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이후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에게도 푼수 같은 웃음이 있습니까?
둘째로, 기도 응답의 역사가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Q. 마태복음 7장 7~11절을 읽고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을 써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구하면 반드시 얻고, 찾으면 반드시 찾고, 두드리면 반드시 열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구하여도 다 얻지 못하고, 찾아도 다 찾지 못하고, 두드려도 다 열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 읽고 바로 깨달아야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Q.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해 보십시오.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황금처럼 귀하기도 하고 변함도 없는 만고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을 그대로 해석하면, 만약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슨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가 그들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기 전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요구에 대하여 어떻게 응답하는지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의 요구에 기꺼이 응답한다면, 하나님도 기쁜 마음으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많은 성도가 하나님에게 하는 것과 사람에게 하는 것을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충성합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열심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어느 사업가가 수억 원의 돈이 급히 마련되지 않으면 부도가 날 지경에 처했습니다. 도무지 방안은 없어 보이고 마음만 안타까워하던 중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누가 먼저 와서 눈물 콧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기도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 사람도 돈 무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돈 백만 원이 없어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업가는 한참을 앉아 있다가 기도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툭 쳤습니다. 기도하던 사람은 너무나 놀라서 돌아보았습니다. 사업가는 그에게 지갑에서 백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꺼내주었습니다.
“이것 가지고 가세요.”
백만 원이 없어서 기도하던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이렇게 빨리 응답받을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몇 번이고 머리를 숙이며 감사하고는 돌아갔습니다. 그가 가고 난 다음 사업가가 비로소 머리를 조아리고 이렇게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제 기도에만 귀를 기울여 주시옵소서.”
직장에 다닌다면 고용인이 정말 요구하는 것을 해 주어야 합니다. 장사를 한다면 고객이 정말 원하는 것을 주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다른 가족들이 나에게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 듣고 주어야 합니다. 특히 아주 어려운 사람의 도움 요청을 받았을 경우 외면하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 자체가 무효가 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사람에게 대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구하고 용서해 주신 줄 믿는 것은 무효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 복을 받는 원리가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복을 받는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복을 빌어 주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야곱이 이것 때문에 에서와 다툰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복을 빌어 주게 하십니다. 그런데 누가 복을 빌어 주는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Q. 다음 성경 말씀을 읽고 답해 보십시오.
1. 민수기 6장 23~27절에 보면 누가 복을 빌어 주는 자입니까?
2. 마태복음 10장 42절에는 누가 복을 빌어 주는 자입니까?
3. 출애굽기 20장 12절에 보면 누구에게 잘하면 복을 받습니까?
4. 누가복음 14장 14절에 보면 누구에게 잘하면 복을 받습니까?
5. 욥기 42장 10절 에는 누가 복을 빌어 주는 자로 나옵니까?
디트로이트 중앙감리교회의 원종수 권사님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미국에서 암 권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복을 받은 것은 어머니 때문이라고 간증합니다. 어릴 때 권사님의 집은 너무 가난해서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머니께서 거지 할아버지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밥을 차려드리고 하룻밤을 주무시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아들이 먹을 밥마저 그분에게 대접하면서 잘 모셨습니다. 당시에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어서 정말 괴로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후 놀라운 복을 받고 돌이켜보니, 바로 그때 거지 할아버지를 대접했던 일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 자매님이 목사님을 찾아가 상담을 요청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외도로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간 아버지를 용서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너무나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를 찾아가서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매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매님께 용서하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은 자매님을 힘들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앞으로 만나게 될 형제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면 자매님은 사랑하는 형제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줄 것입니다.”
그 자매님은 통곡하며 울었고 아버지를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한 사랑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모든 축복과 능력과 약속이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사랑하라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 되셨으니 모든 짐과 문제는 예수님게 다 맡기고, 염려할 것 없고 두려워할 것 없이 우리는 오직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행복 중의 행복입니다.
Q. 여러분에게는 막혀 있는 축복의 통로는 없습니까?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1. 가정에서
1) 부모님을 정말 이해하고 사랑하고 공경하였습니까?
2) 시부모님, 시댁 식구들, 장인 장모에게 소호하게 하거나 미워한 것 없습니까?
3) 남편 아내 사이에 순종과 사랑으로 섬기고 사십니까?
4) 넷째, 자녀를 노엽게 하거나, 잘못했던 일은 없습니까?
2. 교회에서
1) 성도 사이에 화해하지 못하고, 마음에 섭섭함을 품고 있는 일이 없습니까?
2) 모든 성도를 다 사랑하려 하지 않고, 몇몇 사람들과만 친하지는 않았습니까?
3) 내 죄는 보지 못하고 남의 죄만 보고 비판했던 일은 없습니까?
4) 도와야 하는 생각을 하고서도, 인색함으로 도움을 주지 못했던 일은 없습니까?
3. 세상에서
1) 불신자들과 자주 다투고 언쟁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적은 없습니까?
2) 나를 욕하고 핍박한다고 그들을 욕하고 미워하고 저주한 일은 없습니까?
3) 사람들에게 거짓말하고, 속이고 도둑질하여 어떤 이익을 챙긴 것은 없습니까?
4) 지나친 탐욕으로 양보나 너그러움이 없이 다투기만 했던 일들은 없습니까?
5) 나보다 힘이 센 사람에게는 비굴하고 나보다 약한 자는 무시한 일은 없습니까?
5. 교회 공동체와 사랑
요한일서 4장 12절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Q. 다음 질문을 읽고 답을 써보십시오.
1. 요한일서 4장 12절에서 요한 사도는 어떻게 권면합니까?
2. 최근에 친하지 않았던 어떤 교우와 친해진 이가 있다면 누구입니까?
3. 친한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교인들 사이에 친하게만 되어도 쉽게 사랑한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친한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관계입니다.
Q. 다음 질문을 읽고 답을 써보십시오.
1. 만약 여러분이 실패해서 온 가족이 거리로 나 앉게 된다면, 교인들 중에서 여러분 가족을 자기네 집으로 오라고 하고 또 부담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가정이 몇 가정이나 있을까요?
2. 여러분은 길거리에 나 앉을 처지가 된 교인이 있다 여러분의 집으로 맞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예수 믿는 사람처럼 살다가 실패할 경우 내가 속한 교회의 교우들이 나와 내 가족을 기꺼이 돌봐준다면, 그리고 우리가 교우들의 그런 돌봄을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서 기쁘게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용기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가 나빠졌을 때 교우들이 우리를 참된 사랑의 마음을 갖고 대하리라는 확신이 없습니다. 또한 누군가 우리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었을 때 부담 없이 그 손을 잡을 용기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여러 해 동안 아주 정직하게 사업을 해온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누가 봐도 정말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밤늦게 그 권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이야기인즉, 사업이 부도 직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회생 가능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목사님께 기도를 부탁하러 온 것입니다. 목사님은 권사님에게 기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교우들에게도 알려서 합심기도를 요청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권사님은 고개를 힘없이 저으며 다른 교우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 방을 나가면서 다시 한 번 목사님에게 다짐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절대로 다른 교우들에게는 말씀하지 마세요. 그러면 저 교회에 못 나올지도 몰라요”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사랑 공동체의 후원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오늘의 교회는 세상에서 넘어진 약한 자들이 사랑의 돌봄을 받는 곳이 아니라, 강하고 잘난 자들이 서로를 치켜세우며 품위 있는 교제를 나누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셨습니다. 교회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교회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는 변화되기 이전에 영혼의 안식을 갈구하다가 마침내 요크셔 골짜기에서 혼자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 그의 현명한 어머니는 “하나님은 네가 할 더 좋은 일을 갖고 계실 텐데...”하면서 말렸습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진지한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가 찾아간 사람은 “성경은 혼자만의 신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라고 그에게 충고해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웨슬리는 방향을 바꾸어 자기 길에 투신함으로써 영국과 기독교 역사에 귀중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는 사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길이 딱 하나 있다면 바울이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한 말씀을 나에게 하신 말씀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가지라!”
그렇습니다. 나의 힘으로는 안 되지만 주 안에서는 같은 마음을 가지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죄 사함을 받는 구원을 누리지만, 그 후에는 성령의 놀라운 능력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마지막 때 참 교회의 증거는 ‘참사랑이 있는 교회인가’입니다. 기사와 능력에는 많은 가짜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이 가까워 올수록 능력보다는 사랑이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지하 무덤에 살았던 로마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힘으로 견뎠습니다. 공산당 박해 때에도 중국 가정교회가 계속 부흥했던 이유도 교인들의 사랑이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한 청년으로부터 목사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저 통일교를 믿게 됐습니다. 여기 목사관입니다. 마침 아무도 없어서 전화했습니다. 너무 외로워 견딜 수가 없어서 여기로 왔습니다.”
목사님은 빨리 그곳에서 나오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 청년은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았습니다. 그로 인해 실망한 아버지에게 심한 학대를 받고, 학교도 다니지 못한 채 혼자 살았습니다. 마음의 상처로 성격이 왜곡되었던 청년에게 교회는 의족을 해주었고 그는 생전 처음 받아보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섬김에 감격해 울었습니다.
그가 직장을 찾아 다른 지방에 머물게 되었을 때, 교회에서 받은 사랑을 잊지 못해 여러 교회를 찾아 갔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이해받지도 적응하지도 못한 채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에게 거짓 사랑으로 유혹했던 곳이 통일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성령께서 마지막 순간에 목사님에게 전화를 하게 함으로 그곳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에게 그분은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Q. 여러분 마음에는 사랑이 있습니까? 기쁨은 있습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정말 가슴 설레는 말입니다. 이것은 못 배워도 가능합니다. 인물이 없어도 가능합니다. 또 가난해도 가능합니다. 마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부엌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고 있는 엄마를 향해 여섯 살짜리 꼬마가 물었습니다.
“엄마, 무슨 음식을 그렇게 많이 만들어요?”
“응, 옆집 아줌마 드리려고 얼마 전에 옆집 아기가 죽었잖아. 그래서 지금 아줌마 마음에 난 상처가 많이 아파서 음식을 하실 수 없단다.”
잠시 후, 그 아이는 자기 방에 들어갔다 나와서 옆집으로 갔습니다.
“딩동.”
초인종이 울리자 옆집 아줌마가 문을 열었고 아이는 아줌마를 올려다보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밀었습니다. 아줌마가 받아보니 일회용 반창고였습니다.
“이게 뭐니?”
“전에 제 손가락에 상처가 났을 때 아줌마가 이걸 붙여주셨잖아요. 이걸 붙이고 났더니 상처가 금방 나았어요. 엄마가 말씀하셨는데 아줌마 마음에 큰 상처가 생겼대요. 이걸 붙이세요. 그러면 금방 나을 거에요.”
아줌마는 눈물이 치솟는 것을 느끼며 와락 아이를 끌어안았습니다. 꼬마의 사랑 덕분에 아기를 읽고 상심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알바니아라는 가난한 나라의 어느 마을에 형편이 아주 어려운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배운 것도 없었고 인물도 형편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소녀는 어려서부터 이웃에게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녀에게 좋은 일이란, 가난해도 할 수 있고 못 배워도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인도 사람들이 많이 어렵다는 뉴스를 듣고 기도하고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인도에 가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해주세요.”
하지만 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인도에 가는 유일한 길은 신부가 되든가 아니면 수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수녀가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녀는 인도에 가서 가난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모두가 우습게 여기며 그녀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온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각 나라의 지도자들 모두가 그녀를 귀히 여기게 되었고 나중에는 노벨상도 안겨주었습니다. 그녀는 온 세계 인류의 존경을 받는 여자가 된 것입니다.
그녀는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테레사 수녀입니다. 그녀가 죽자 온 인류가 눈물지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온 인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 믿음 다지기
이번 단원을 예습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깨닫게 하신 내용이 무엇인지 잠잠히 묵상해보십시오. 개인적으로 여러분에게 주시는 주의 음성이라고 붙잡은 내용을 한두 가지로 정리해보십시오. 그리고 다음 질문에 답하십시오.
-예습한 내용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나 성구는 어떤 것입니까?
-위의 내용을 여러분 자신의 기도로 바꾸어 써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적용하라고 하십니까?
번호 | 제목 | 작성자 | 등록일 | 조회수 | 첨부 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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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12단원 : 전도자의 사명 | 김영돈 목사 | 2019-06-07 | 395 | |
12 | 11단원 :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라! | 김영돈 목사 | 2019-06-07 | 509 | |
11 | 10단원 : 사랑으로 사는 사람 | 김영돈 목사 | 2019-05-17 | 473 | |
10 | 9단원 : 소망으로 사는 사람 | 김영돈 목사 | 2019-05-17 | 562 | |
9 | 8단원 : 믿음으로 사는 사람 | 김영돈 목사 | 2019-05-17 | 495 | |
8 | 7단원 : 기도로 사는 사람 | 김영돈 목사 | 2019-04-30 | 462 | |
7 | 6단원 : 목자의 음성 | 김영돈 목사 | 2019-04-17 | 337 | |
6 | 5단원 : 성령 충만한 제자 | 김영돈 목사 | 2019-04-17 | 453 | |
5 | 4단원 : 나는 죽고 예수는 살고 | 김영돈 목사 | 2019-04-08 | 57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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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1단원 : 십자가의 능력 | 김영돈 목사 | 2019-03-13 | 650 | |
1 | 오리엔테이션 | 김영돈 목사 | 2019-03-13 | 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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