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
1단원 십자가의 능력
1. 십자가의 능력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성경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에게 참으로 놀라운 삶을 약속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부족함도 느끼지 않는 넉넉한 삶,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삶, 도전해오는 시험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삶과 같은 놀라운 축복의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약속된 말씀과 너무나 다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하신 삶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면서 여러분의 삶과 직접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Q. 여러분은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까?
약속된 삶 (요한복음 4장 14절)
나의 삶
예수님이 물을 긷기 위해 나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곧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구원자로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그 가운데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는 약속의 말씀은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면 이제 아무런 부족함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만족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부족하게 느끼는 것이 많고 불평불만이 많다면 그 사람은 단지 교회만 다니는 사람입니다.
Q. 여러분은 주의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약속된 삶 (요한복음 7장 37~38절)
나의 삶
여기서 “생수의 강이 흘러난다”는 말은 주위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면 여러분은 가정, 직장, 학교에서 놀라운 은혜를 끼치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거나 상처만 주고 산다면 당신은 그저 교회만 다니는 사람일 뿐입니다.
Q. 여러분은 시험을 만날 때 넉넉히 이깁니까? 아니면 겨우 이깁니까?
약속된 삶 (로마서 8장 35~37절)
나의 삶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큰 시험을 당하고, 좌절의 위협과 고통을 겪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시험을 당한다 할지라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의 끈으로 꽉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시험을 만날 때 넉넉히 이긴다면 진정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겨우 시험에 이기거나 매번 지기만 한다면 그저 교회만 다니는 사람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은 말씀의 약속과는 달리 좌절과 낙심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가끔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신가?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은 안 믿는가?”
“예수님은 정말 내 안에 계신가? 그렇다면 그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가?”
“천국과 지옥은 정말 있는가?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예수님을 믿으면 정말 복을 받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데도 가난한 사람, 실패한 사람,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도하면 정말 응답받는가? 기도했는데도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왜 그런가?”
실제로 많은 성도가 ‘교회에는 다니지만’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도 없고 간증할 것도 없는 종교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자신의 복(福)을 비는 대상일 뿐이며, 십자가는 능력이 아닌 종교적인 상징일 뿐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런 경우는 아닙니까?
Q. 고린도전서 1장 18절을 읽고 답해보십시오.
① 십자가의 도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떻게 보인다고 했습니까?
② 십자가의 도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한 것’으로 보이고 또 한 부류의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어떤 능력을 깨닫습니까?
예수님을 믿어도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은 십자가의 도가 왜 능력인지를 모릅니다. 그냥 십자가를 볼 뿐입니다. 그저 십자가를 바라보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고 ‘여기는 예배당인 모양이구나’하는 느낌만 있을 뿐 하나님의 능력인 줄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교회에 다닌다고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목 하시고 쓰시는 사람은 정말 예수 믿는 사람, 곧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19세기 러시아에는 기독교인이 9000만 명, 성직자는 6만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5만 4000명 밖에 안 되는 공산당원의 손에 나라가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무엇일까요? 십자가를 아무리 바라봐도 알 듯 모를 듯,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돈의 능력은 잘 알고 있습니다. 세 살짜리도 압니다. 돈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도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는 어떤 능력이 있습니까?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했으니,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Q.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러분에게 어떤 능력이 되는지 솔직히 써보십시오.
2.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
누가복음 5장 8절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바로 우리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큰 능력인지 모릅니다. 실제로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지만, 정말로 자기가 죄인인지,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제대로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죄를 짓고도 자신의 죄를 모르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에 대해 분노하고 경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있습니까?
한 남자가 결혼 30주년을 맞아 아내의 생일이 되었을 때, 어떤 선물이 받고 싶은지를 물었답니다. 그러자 아내는 다른 선물을 필요 없으니 그날 남편의 하루 중 두 시간만 달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내키지 않았지만 아내가 워낙 강경하게 나와서 그 약속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생일날 저녁, 아내는 남편을 거실 소파에 앉히고 말했습니다.
“여보, 제가 이제 두 시간 동안 당신에게 얘기할 텐데, 제가 무슨 말을 하든지 당신은 ‘맞아, 옳아, 그렇지!’ 그 말만 해주세요.”
그러고 나서 아내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자가 듣다 보니 사실이 아닌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중간 중간 “아니, 여보 그건…”하고 말을 끊으니까, 아내는 이에 질세라 “여보, 두 시간만, 두 시간만…” 하며 듣기만 해달라고 애원하더라는 것입니다. 남편은 할 수 없이 듣기만 하는데, 10분이 지나자 속이 뒤틀리고, 20분이 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르고, 30분이 지나자 조금만 더 들으면 억울하고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은 아내가 지난 30년간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30년 동안 같이 살아왔는데, 어떻게 아내의 마음과 생각을 이다지도 몰랐단 말인가!’
한 시간을 계속 이야기하는 아내를 보면서, 남편은 급기야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습니다. 결혼 이후 그때껏 아내가 겪은 아픔과 상처를 너무나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약속된 두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남편은 아내의 무릎을 붙잡고 한참 울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배우자에게, 부모님에게 그리고 자녀에게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분명 잘못한 것이 많은데,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지나가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1999년 1월 23일, 쉰여덟의 스테인스 그레이엄(Steins Graham) 선교사는 열 살된 티머시와 일곱 살 된 필립, 두 아들을 데리고 인도 오리사 주에서 산탈 부족을 위해 열리는 정글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 묵을 만한 곳을 찾지 못한 그들은 날이 밝을 때까지 타고 간 지프에서 새우잠을 자기로 작정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자정이 지난 새벽, 그들이 잠들기를 기다리던 힌두교 근본주의자들은 지프에 돌을 던지고, 유리창을 깨고, 휘발유를 붓고는 불을 질렀습니다. 선교사와 두 아들은 자동차에서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도당들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다시 불구덩이 속으로 밀려났습니다. 도당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환호했습니다. 결국 아버지와 두 아들은 불꽃 속에서 서로 껴안은 채 그들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처참한 만행을 저지른 힌두교도들은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간음한 다음,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밧세바의 남편인 충신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엄청난 죄가 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양 무리를 거느린 어느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어린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다는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다윗은 얼마나 대노했습니까? 사실 나단 선자자는 다윗을 죄를 지적하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는 그렇게 잘 보면서도 자신의 죄를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 다윗의 모습이자,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Q. 누가복음 5장 8절에서 예수님 말씀을 좇아 많은 양의 물고기를 잡은 베드로는 무엇이라 고백했습니까?
많은 양의 물고기를 잡은 베드로는 덩실덩실 춤을 추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이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가 갑자기 죄를 더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기적을 체험한 순간, 영안이 열려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그리고 자신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를 범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오순절을 맞은 제자들은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충만해진 베드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그 순간 유대인들은 통렬한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라고 부르짖으며 베드로 앞에 나아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의 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18세기 미국에서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부흥의 불길은 조너선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목사의 설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주일 예배 때 에드워즈 목사는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통회자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1600-1700년대의 미국 사람들이 오늘날의 우리보다 더 많이 죄를 지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을 통해 다가오시는 빛 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의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해결하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부흥은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죄를 깨닫는 것이 영적 생명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자기가 얼마만 한 죄인인지를 깨닫는 것이 거듭남의 시작입니다.
Q. 여러분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 거듭났다고 말할 수 있는 때는 언제입니까? 그 경험을 써보십시오.
3. 남을 정죄할 자격이 없다.
마태복음 7장 1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여러분은 자신이 정말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판가름 될 수 있습니다.
Q. 여러분은 지금까지 여러분보다 더 악질인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누구인지 생각나는 대로 써보십시오.
만약 위의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했다면 여러분은 아직 십자가의 능력에 의지하여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눈이 뜨인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남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아니,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인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바울입니다. 이 사람의 본명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바울로 개명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과거 삶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빌 3:5~6)
자신의 고백대로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잡아 죽이는 것을 예사로 하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율법의 기준에 따르면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어떻게 고백했을까요?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로는 죄인 가운데 괴수, 가장 큰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이며, 자기 죄를 깨달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Q. 여러분은 예수님을 영접한 후, 마음의 돌을 다 내려놓으셨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지 않을뿐더러 남을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십자가의 능력을 올바로 깨닫고 그 능력을 바르게 체험한 것입니다. 그 같은 사람은 만날수록 은혜롭습니다. 결국 그런 사람이 천국 같은 교회를 이룹니다.
Q. 마태복음 7장 1~5절에서 예수님은 왜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욕심은 마음에 담아두면서 남의 욕심에 대해서는 비난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거짓은 품어두면서 남의 거짓은 참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은 그토록 이기적이면서, 이기적인 다른 사람은 정죄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으로 거듭나면 가장 먼저 이것부터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남에 대해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회개 기도하는 것을 보면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더 애통해하면서 회개합니다. 오히려 죄를 많이 짓고 사는 방탕한 사람이 회개하지 않습니다. 눈물의 양으로 따진다면 경건한 사람이 더 많은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영적 눈이 뜨여서 자신의 죄를 더 많이 보는 까닭에 애통해하는 것이고, 방탕한 사람이 울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Q. 오늘 새롭게 깨달은 여러분의 죄는 무엇입니까?
4. 믿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시편32편 1절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만약 십자가가 우리의 죄만 깨닫게 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우리는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죄를 너무 많이 지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 죄를 더욱 분명히 깨닫게 해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깨닫게 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주시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정작 죄는 ‘내가’ 지었으면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그 죗값을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에게’ 지우셨음을 봅니다. 이 은혜가 믿어지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은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은혜란 무엇일까요? 운혜란 말에는 반드시 두 가지 내용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는 ‘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넘치는 사랑이 부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만약 어떤 학생이 형편없는 성적표를 받았다고 합시다. 그 어머니는 세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반응은 성적표를 보는 순간 얼굴이 굳어지며 당장 성적표를 내던지고 “이것도 성적이라고 받았니? 얼른 가서 회초리 가져와!” 라고 큰 소리로 야단칠 수 있습니다. 이를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합니다. 두 번째 반응은 깊이 한숨을 쉬며 “어쩌겠니... 다음에는 더 잘 하거라”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정도만 가지고도 은혜라는 말을 씁니다만 정확히 표현하면 온정(溫情)입니다. 세 번째 반응은 고개를 푹 숙인 아이를 꼭 껴안아주며 “사랑한다! 엄마는 네 성적 때문에 너를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않아. 시험 보느라 애 썼어. 오늘 아빠 퇴근하시면 외식이라도 할까? 네가 좋아하는 피자 먹으러 가자.”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것이 웬 일입니까? 피자는 무슨 피자입니까? 피가 나게 맞아도 할 말이 없는데, 도무지 받을 자격이 없는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경우에 은혜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바로 이 용서의 은혜를 받았음을 말해줍니다.
Q. 여러분은 어떤 은혜를 받고 있는지 아래 성경을 읽고 답해보십시오.
(요한복음 1장 29절)
(이사야서 53장 4~6절)
(로마서 5장 6~8절)
Q.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난 뒤 어떤 복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죄가 전부 드러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을 사랑하고 존경하던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그들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어떠할까요? 천국에 갔을 때, 여러분의 과거 기록이 전부 그대로 살아 있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죄는 이미 십자가의 보혈로 다 지워졌습니다. 우리는 위선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히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천국에 가면, 죄가 가려지고 씻김 받은 것이 가장 큰 복임을 알게 됩니다. 그 자리에 서면 다른 어떤 복도 의미가 없습니다. 물질의 복, 건강의 복, 성공의 복...전부 귀하지만 죄 사함의 복만큼 귀한 것은 없습니다. 속죄함의 은혜가 가장 큰 복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우리의 죄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용서되고 처리되었다는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같이 놀라운 속죄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죄책감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속죄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 채 죄 짐에 눌려 사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집회에서 만난 한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권사님은 열일곱 살에 시집을 왔는데, 남편이 곧바로 만주로 징용되는 바람에 임신한 몸으로 친정에 돌아갔습니다. 나무껍질까지 벗겨 먹던 어려운 시절이었으므로 입이 아홉인 친정 식구들은 차가운 눈길을 보냈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 아이를 낳고 보니 쌍둥이였습니다. 어린 산모로서는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기 한 명은 젖을 안 물려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이 것은 누구에게도 말할지 못할 비밀이 되었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 무거운 죄 짐은 계속 지워졌습니다. 교회의 권사님이 되고 나서도 ‘하나님 앞에 가면 이 죄를 어떻게 하나?’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조금이라도 속죄하고자 교회의 힘든 일들을 도맡아 하며 기쁨도 없이 신앙생활을 했답니다.
목사님은 그 권사님과 상담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권사님의 죄는 이미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권사님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자식 죽인 어미도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십자가 복음 앞에 엎드러져서 통곡했습니다. 그날 저녁 집회 후, 권사님이 환한 표정으로 성도들과 인사를 나누자, 담임목사님과 교우들이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 시절 홀리 클럽이라는 경건 단체를 만들고, 성경 공부 또한 열심히 했습니다. 그는 미국에 선교사로 가기로 자원했습니다. 그것을 보아도 그가 예수님을 몰랐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경건과 믿음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가는 배에서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거의 죽음에 가까운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입니까? 배에 같이 타고 있던 모라비아 교도들은 어린아이까지 전부 평안한 모습으로 찬송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에 웨슬리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웨슬리는 죽음의 권세를 이길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독일에서 온 모라비아 교도의 영적 지도자 스판겐베르크가 웨슬리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대의 영혼을 향해 그대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를 주십니까?”
웨슬리는 이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는 성령에 대해 모르고 있었습니다. 스판겐베르크는 연달아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웨슬리가 겨우 ”나는 그분이 온 세상의 구주이심을 압니다.“ 라고 대답하자, 스판겐베르크가 또 물었습니다.
“그분이 당신을 구하셨음을 믿습니까?”
이에 웨슬리는 전혀 확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저를 위해 죽으셨기를 바랍니다.”
웨슬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미국 선교여행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삶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는 귀국하면서 “나는 인디언을 회개시키러 갔다. 하지만 나를 회개시킬 사람은 누군가? 나는 믿음이 부족함을 느낀다. 나는 설교할 자격이 없다”고 눈물로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여전히 죄의 권세에 눌려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믿음이 부족했던 웨슬리가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한 기도회에 참석한 웨슬리는 사회자가 낭독하는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다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이 강하게 부딪혀오는 순간, “그렇구나! 구원을 위해 나는 다만 그리스도만 믿으면 되는구나. 주께서 나의 죄, 나의 모든 죄를 거두어 가셨구나.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주셨구나!” 라고 깨달았습니다.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졌습니다. 속죄의 은혜를 깨달은 것입니다.
웨슬리는 감격에 차서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믿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그렇습니다. 그 순간, 존 웨슬리의 죄 짐이 벗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5. 축복의 확신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가장 강력한 표징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가장 아끼는 독생자를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 놀라우신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지전의 삶이 어떠했든지, 어떤 출신이든지, 그 어느 것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데 아무런 방해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며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Q. 누가복음 15장 11~24절에 나오는 아버지는 어떠한 사랑을 보여줍니까?
우리는 이 본문을 가리켜 흔히 ‘탕자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탕자는 둘째아들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가 유산으로 물려줄 재산을 분할해달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죄였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고 가볍게 넘길 수도 있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패륜아의 모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절대로 죽기 전까지는 재산을 물려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찾아온 둘째아들이 유산으로 넘겨줄 재산을 미리 달라고 말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런 아들에게는 유산을 주지 않아도 됩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유산을 달라고 할 때, “이놈아!”하면서, 몽둥이를 쳐들고 내쫓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리할 경우, 아들을 영원히 잃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야단치거나 징계하여 내쫓는 대신,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올 날을 기대하며 재산을 포기하고 둘째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습니다.
‘탕자 이야기’라는 제목은 방탕한 둘째아들에게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탕자인 둘째아들을 용납하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에게 초점을 두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방탕한 우리를 징계하시지 않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이 요구하는 대로 재산을 분할해준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사랑과 은혜를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할 수 있습니다. 매 맞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회개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온전한 회개가 아닙니다. 사랑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아오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왔을 대, 얼른 달려나가 돼지 오물로 엉망진창인 아들을 끌어안고 더러운 얼굴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 순간, 탕자의 죄 짐은 벗겨졌습니다.
브라질의 어느 시골마을에 남편이 병들어죽어서 딸만 데리고 사는 마리아라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릴 대의 딸 크리스티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듣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하지만 10대가 되면서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말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큰 도시로 나가 놀다가 자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딸이 걱정된 마리아는 크리스티나에게 “도시에는 도둑도 많고 험한 사람도 많으니 조심해야 한다. 나쁜 친구 사귀지 말고 집에 있어라”하고 당부했지만 딸은 어머니의 말씀을 무시한 채 가출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리아는 딸아이가 머물 곳으로 짐작되는 유흥도시로 직접 나갈 것을 결심하고 사진관에 들러 자신의 증명사진을 여러 장 확대 복사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도시로 출발한 마리아는 호텔, 나이트클럽, 술집, 도박장 등을 비롯해서 딸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마리아는 유흥지역 곳곳에 확대한 자신의 사진을 붙였습니다. 화장실, 전화박스… 심지어 죄인 수배사진 옆에도 자신의 사진을 가져다 붙였습니다. 그리고 사진 뒤에는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겨두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고 지금 네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나는 전혀 상관하지 않으니 돌아오려무나.”
딸을 찾느라 수중의 돈을 모조리 써버린 마리아는 지친 몸을 이끌고 시골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밤새도록 나이트클럽에서 춤추고 나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계단을 려오던 크리스티나는, 벽면에서 언뜻 익숙한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바로 어머니의 사진이 붙어 있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얼른 그 사진을 떼었습니다. 그 동네에 사진이 붙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사진에는 어머니의 메모가 있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깜짝 놀라 주위를 살폈습니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보니, 자신이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집 나간 딸을 찾으려면 딸의 사진을 붙여야 할 것인데, 어머니는 자신의 사진을 붙여놓은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메모를 남겨놓았지만 다른 사람이 딸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딸의 이름을 쓰지 않았습니다.
결국 평생을 선량하게 살아온 어머니는 딸을 대신하여 온갖 죄가 들끓는 우범지역에 자신의 얼굴을 내다 판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시작됩니다.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면 불평했던 것, 원망했던 것, 낙심했던 것, 열심 없이 신앙생활 했던 것, 헌신하지 못했던 것이 전부 죄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회개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에게는 회개와 함께 축복의 확신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열등의식을 비롯한 좌절과 낙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죄 용서와 구원의 믿음은 있는데, 축복의 믿음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축복의 믿음을 가질 때부터 믿음은 능력이 되고 기적이 도비니다. 두려움도 염려도 모두 사라집니다. 이 믿음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시카고에 대화재가 났을 때, 시가지 한복판에 위치한 무디 목사의 교회도 전소했습니다. 기자들은 이를 놓칠세라 무디 목사에게 다가가 “목사님,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불에 타 없어지도록 왜 가만히 두시는 겁니까?”하고 빈정거렸습니다. 이에 무디 목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진작부터 하나님께 큰 교회를 달라고 기도해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얼마 안 가서 불에 탄 교회보다 더 크고 훌륭한 교회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뒤, 하나님께서는 무디 목사의 부흥회를 통해 은혜 받은 영국 교회들이 건축헌금을 보내어 예전 교회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운 교회를 짓게 하셨습니다.
무디 목사의 믿음은 단순한 구원의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정말로 믿었기 때문에 예배당이 불타 없어지는 현장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열등감, 좌절감, 낙심에 빠지는 것은 여건과 형편이 힘들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전도사가 도자기를 만드는 성도의 집을 심방했다가 예쁜 꽃병 두 개를 보고 감탄하여 “저젓은 얼마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성도는 “저 꽃병은 파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성도는 그 이유를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몇 년 전만 해도 술주정뱅이에다가 노름꾼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교회 집회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쓰레기 더미에서 흙무더기를 발견했습니다. 쓸모없다고 역니 누군가가 버린 것이었지요. 저는 그것을 집에 가져와 반죽하고 모형을 만들어 구웠습니다. 저 꽃병은 그날 만든 것입니다.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나에 대해 똑같은 일을 하실 수 있을 거야!’ 그때부터 저는 제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께서 새사람으로 만들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십자가의 도 외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놀라우신 은혜를 완전히 깨닫도록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Q. 그동안 늘 받고 살았지만 오늘 새롭게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까? 한번 써보십시오.
∎ 믿음 다지기
이번 단원을 예습 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깨닫게 하신 내용이 무엇인지 잠잠히 묵상해보십시오. 개인적으로 여러분에게 주시는 주의 음성이라고 붙잡은 내용을 한두 가지로 정리해보십시오. 그리고 다음 질문에 답하십시오.
-예습한 내용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나 성구는 어떤 것입니까?
-위의 내용을 여러분 자신의 기도로 바꾸어 써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적용하라고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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