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
가남감리교회 제자훈련
2단원 회개의 기쁨
1. 정죄와 징계
요한복음 13장 10절
이미 목욕한 자를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롬8:23)
이 말씀은, 우리 몸이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온전히 죄에서 구원받을 것임을 가리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구원받은 우리 안에 여전히 죄가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이단 종파인 구원파에서는 교인들에게 “당신은 정말 구원받았나요? 그렇다면 언제 구원받았나요? 몇 월, 며칠? 진짜 구원받았으면 생일을 기억하듯이 구원받은 날짜를 알아야 하는데, 모르는 것을 보니 구원받은 게 아니군요”라고 말하며 접근해 옵니다. 동시에 성도의 죄책감 문제를 건드립니다. 죄책감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말합니다.
구원파의 큰 문제 중 하나는 구원의 문제를 분명히 확인해주는 것 같으면서도 회개에 대해서는 부인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구원이 단순히 ‘깨달음과 시인’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많은 교인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단의 유혹에 빠져서 넘어갑니다. 구원파의 가르침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죄 문제는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다 해결해 주셨으니, 우리가 죄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울 필요가 없다는 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가리킬 뿐, 이제부터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죄도 다 용서하십니다. 그 어떤 죄도 아버지와 우리를 갈라놓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를 무조건 용납하시는 것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죄는 단순히 불신자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죄의 문제는 매우 심각합니다. 그러나 불신자의 죄와 그리스도인의 죄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짓는 죄와 불신자들이 짓는 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Q. 다음 성경을 읽고 답해보십시오.
1. 로마서 8장1절과 34절에서 그리스도인에게는 무엇이 없다고 했습니까?
2. 히브리서 12장 7~8절, 요한계시록 3장 19절에서 그리스도인에게는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3. ‘정죄’와 ‘징계’ 사이에는 서로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죄가 구원의 문제를 흔들어놓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사탄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게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목전에 두시고 제자들을 다락방에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직접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세족식입니다.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을 때, 베드로는 절대로 예수님이 자기 발을 씻어주셔서는 안 된다고 거절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발을 씻지 않으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요 13:10)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과 달리 목욕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발만 씻으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처럼 죄를 지음에도 불신자와 다른 것은, 불신자들은 죄를 지을 경우 정죄를 받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능력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징계를 받는 것으로 그치는 것입니다.
정죄와 징계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허물과 죄로 더러워져 있다 해도 정죄해서 버리시지 않습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께 물려받은 유산을 모두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반지를 끼워주며 다시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다시는 정죄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죄와 허물이 있으면 ‘즉시 징계하여 회개하게’하십니다. 이것이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것과 같은 사랑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어느 날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여자 교인이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죄를 범해도 하나님은 저를 내버려두고 계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게 분명해요.”
이 얘기를 듣고 있던 무디는 지그시 부인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부인…부인은 지금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부인이 화들짝 놀라 반문했습니다.
“왜요?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데요.”
그러자 무디가 다시 말했습니다.
“부인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부인을 그대로 놔두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Q. 예레미야서 5장 25절에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했는지 말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죄 위에 은혜와 부흥을 부어주시지 않습니다. 죄와 허물이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은혜와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기쁨이 사라집니다. 기도의 문이 막힙니다. 감사가 사라집니다. 마음의 평화가 사라집니다. 모든 힘을 빼앗긴 채 무능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더욱 필요합니다. 회개가 없어도 삶이 잘 풀린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버림받은 증거입니다. 징계가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죄는 잊어버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나는 죄와 싸우리라. 나는 결코 죄의 종노릇하지 않으리라’는 자세를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죄와 싸우겠습니다. 죄의 종이 되지 않겠습니다. 이기기 원합니다.”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힘으로는 죄와 싸울 수 없습니다. 죄 뒤에서는 마귀가 역사하기 때문이고, 죄를 지은 사람은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죄와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싸울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
고린도전서 15장 5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니.
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거듭난 신자들이 원치 않는 죄를 계속 짓게 될까요?
거듭난 신자에게도 자꾸만 죄를 짓게 만드는 죄성(罪性)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만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듭난 신자들 속에 남아 있는 내적인 죄성을 온전히 없애 주시려고 ‘성령의 은혜’라는 아주 복된 은혜를 예비해놓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의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Q 요한일서 1장 9절 말씀 속에 나타난 놀라운 약속이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우리 죄를 사해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로 죄를 짓습니다. 그렇지만 회개함으로써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죄를 회개한다고 해서 누구나 죄 씻음을 받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회개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보혈이 있기에 회개하면 죄 씻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회개해도 십자가가 없기에 씻음을 받지 못합니다. 죄 씻음을 받는 은혜는 십자가를 붙잡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계속할수록 은혜와 감격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그들은 십자가의 감격을 누리지 못할까요? 예수 믿은 지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회개의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죄 문제를 그냥 지나치고 너무나도 가볍게 넘겨버리고 있습니다.
암(癌)으로 돌아가신 한 장로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장로님은 경건한 신앙인이라기보다는 교회 정치에 열심인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자녀들은 참으로 신실했고 그 중 한 명은 목사님의 사모님이었습니다. 평소 아버지를 잘 모시지 못한 것에 못내 아쉬움을 느낀 딸은 지극 정성으로 아버지를 간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예배 시간에 장로님의 딸은 아버지가 회개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버지한테 가서 회개하라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니, 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너무나 분명한 마음을 주셨기에 딸은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시간에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회개하기를 원하세요”
그 말을 들은 장로님이 얼마나 노발대발 역정을 내시던지, 딸은 당장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평생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다고 생각하는 자신에게 딸이 회개하라는 말을 전하니, 몹시 언짢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이러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를 이대로 하나님 앞에 가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흘쯤 지났을까. 장로님이 자녀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자녀들이 전부 모인 자리에서 장로님은 자신이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습니다. 극심한 통증으로 다리를 만지지도 못하게 하시던 분이 무릎을 꿇고 통곡하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잘못을 회개합니다...”
부인과 자녀들에게도 “이것은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며 일일이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리에 누웠다가 회개할 일이 생각나면 또 일어나서 다시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그렇게 내리 몇 날을 회개하시다가 어느 날 저녁 아무 고통도 없이 평안히 소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기다리시던 회개를 다 쏟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입은 채 하나님께 가신 것입니다.
죄는 결코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지나치고 넘겨버릴 문제가 아닙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처럼, 죄의 문제가 꼭 그와 같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죄 문제를 지나치면 그 다음에는 더 자주 죄를 짓게 됩니다. 작은 죄를 그냥 넘겨버리면 그 다음에는 더 큰 죄를 짓게 됩니다. 그처럼 눈덩이같이 불어나는 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상태가 반복되면 두려운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죄를 많이 짓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도, 스스로 마음 편히 여기고 사람들과 웃고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 않게 예배드립니다. 형제와 싸우고도 아무렇지 않게 예배드립니다. 심령이 완악해졌다는 증거입니다.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건널목에서 사람들과 함께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빨간 불인데도 태연히 무단횡단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신호를 위반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태연히 신호를 어기는 자세가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그 같은 사람은 자기 이익과 관련이 있으면 어떠한 죄라도 저지를 사람입니다.
죄보다 무서운 것은 회개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결정적인 순간을 노리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을까’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을까’ 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와 법 역시 죄를 짓지 않는데 주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들키지 않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는 듯합니다.
사람들은 죄를 짓고 들키지 않으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합리화합니다. 양심에 약간의 거리낌이 있어도 쉽게 무시해버립니다. 증거가 있는 것만을 죄라고 여기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서도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들킨 죄보다 들키지 않은 죄가 더 많습니다. 스스로 합리화 할 수 있고 사람의 눈 역시 얼마든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만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살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Q 여러분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은 채 넘어간 적은 없습니까?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더러운 것을 세제로 닦듯이 우리 마음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죄를 토설하고 자복하여 예수님의 보혈로 말끔히 씻어내야 합니다. 죄는 세월이 지났다고 하여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기억에서 사라졌다고 하여 소멸하는 것도 아닙니다. 봉사하고 헌금했다고 하여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를 드렸다고 사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선행으로 상쇄되는 것도 아닙니다. 죄를 씻는 방법은, 제아무리 부끄럽고 힘들지라도 주님 앞에 자신이 지은 죄를 낱낱이 자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는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어집니다.
눈물로 통회하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한 번 보혈로 씻어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피해를 주었다면 보상하십시오. 그러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기 시작합니다. 철저한 회개가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회개만 하면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이르고 영생을 얻도록 친히 피 흘려주셨습니다. 당신의 걱정보다, 당신의 재산보다 당신의 명예보다 더 소중한 것은 주님을 향한 당신의 마음입니다.
3.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
에베소서 4장 32절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회개 없이 살고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회개한다고 하면서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없는 것도 커다란 문제입니다.
요한일서 3장 21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두려운 것이 없어지고, 항상 기쁨과 감사가 넘쳐납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의 보혈로 속죄 받지 못할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담대히 기도해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몹시 쇠약해진 몸으로 침상에 누워 있는데, 마귀가 방에 들어왔습니다. 가만히 보니 마귀가 굉장히 큰 두루마리 책을 펼쳐놓는데, 그때까지 자신이 지은 죄가 전부 기록되어 있더랍니다. 루터는 그 즉시 낙심했지만 마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잊은 것이 있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 모든 죄를 전부 씻어주셨다는 것을 빼놓았군.”
그러자 마귀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루터는 다시 새 힘을 얻고 종교개혁을 이루어냈다고 합니다.
어떤 교인은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하여 짓고 회개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너무 죄송하여 더 이상 회개할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회개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몇 번이고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주시옵고”(마6:12)
용서의 은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다른 사람을 많이 용서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 이면에는 예수님도 우리를 그처럼 반복해서 용서해주시겠다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인 중의 죄인이라 하더라도 490번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회개하는 중에 죄가 싫어지게 됩니다. 죄 짓기 전에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고백하게 됩니다.
“난, 다시 죄짓고 회개하고 싶지 않아. 난 그러고 싶지 않아!”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고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죄가 싫어지면 이긴 것입니다. 회개가 죄를 이기도록 만듭니다. 회개하면 성령님이 반드시 죄를 이기도록 만들어주십니다. 문제는 그 약속을 확신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Q 요한일서 5장 18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정말 죄를 짓지 않는 것일까요? 이는 예수님을 믿으면 저절로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회개생활을 지속함으로써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죄 사함의 확신을 가지고 회개함으로써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회개는 완전한 용서에 기초합니다. 공연 무대에서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 서커스를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코끼리 같은 동물이 나와 재주 부리는 것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도 서커스의 백미는 공중그네 타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공중그네 타기를 보면, 바로 아래에 그물을 쳐놓습니다. 그물은 공중그네를 타던 곡예사가 실수로 떨어져도 안전하게 받쳐주는 장치가 됩니다. 그물은 몇 번이고 받쳐줍니다. 그런데 만약 그물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곡예사들이 불안해하는 나머지 공중그네 타기 자체가 불가능해질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참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완전한 용서가 기반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다가 혹시 실수하고 넘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용서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이상하거나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여겨지십니까? “마음껏 죄를 짓고 회개만 하면 되겠네?” 하고 엉뚱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나올까 봐 걱정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은혜는 언제나 이렇게 악용당할 위험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면 모든 죄를 사하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우리에게 죄를 이길 힘이 됩니다.
공중그네 타기 공연 때 아래에 그물이 없다면, 곡예사들은 더 자주 떨어질 것입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물이 쳐져 있다면 떨어질 확률도 낮습니다. 마음이 안정되어 과감히, 멋있게 공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용서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할 텐데, 기도를 많이 해야 하는데, 전도해야 하는데, 성경 읽어야 하는데... 나는 자격이 없어요. 큰일이에요” 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공중그네 타는 곡예사가 공연하다가 떨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아직 십자가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율법적인 의무감에 눌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몇 번이고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사람들의 삶은 진정으로 변화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고통스러워하십니다. 십자가에서도 그러하셨고, 지금 우리 안에 계실 때에도 그러하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엡 4:30)
이것을 알면 죄가 싫어집니다. 죄가 싫어지면 이긴 것입니다. 단지 회개를 그치는 것이 문제 될 뿐이며, 계속하여 회개하면 반드시 죄를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속죄함의 은총을 누리는 길은 죄에 대해 통회하며 회개할 뿐 아니라, 용서하시는 십자가의 은혜를 확신하고 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본래 수도사였습니다. 수도사는 죄를 지으려고 해도 지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여자가 없으니 간음죄를 지을 수 없고, 사유재산이 없으니 도적질할 것도 없고, 명예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출세해야 할 필요도 없으니 인간적인 욕망의 노예가 될 리도 없습니다. 수도사는 오로지 하나님 앞에 기도와 명상을 하며 사는 사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틴 루터는 수도원에서 죄로 고민했습니다.
그는 “내 죄, 내 죄, 내 죄입니다.” 하고 부르짖으며 가슴을 쥐어뜯고 괴로워했습니다. 아무리 회개하고 고행을 해도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죄를 자복하는 고해성사를 하루에 스무 번도 더했다고 합니다. 가서 죄를 고하고, 돌아와서 고민하다가 또 가서 고하고... 그런 식으로 계속 반복했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신부가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너무 귀찮아진 나머지, “루터야, 죄 좀 모아서 오너라” 하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루터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죄로 여겨 괴로워했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의 사악함을 괴로워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죄 문제로 고민하고 괴로워했는데도, 당시 수도사들은 복음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속죄의 근거를 어디에 둬야 할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루터가 살던 때의 로마에는 스칼라 산타(scala santa)라는 성당이 있었습니다. 그 성당에는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재판받으실 때 올라가셨다는 계단이 있는데,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뜯어서 그곳에 옮겨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 죄 사함을 받고, 심지어 그렇게 하면서 기도하면 연옥에 있는 죄인도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루터 역시 한 계단씩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계단에 입을 맞추고, 주기도문을 외웠습니다. 하지만 계단을 다 올랐는데도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 마치 큰 불빛을 보는 것처럼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며, 그까짓 무릎으로 계단을 기어오른다고 죄 사함을 받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 사함은 회개함으로 주어지지만,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그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회개는 예수님을 가장 놀랍게 체험하는 수단입니다. 모든 죄를 회개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설교, 기도, 가정, 사업, 건강... 전부 해결 받았습니다. 회개를 통해 십자가의 진리와 용서, 믿음과 감사의 원리를 깨닫고, 회개의 기쁨과 회개의 능력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회개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해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할 때, 하루에도 몇 번씩 예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손길을 느끼며, 용서받은 감격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Q 사도행전 3장 19절에서 우리가 회개하면 어떤 유익이 있다고 했습니까?
미국의 댈러스 신학교 총장을 지낸 유명한 설교가인 척 스윈돌 목사가 목회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은 교통신호부터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설교한 후, 차를 몰고 집으로 가던 중 잠시 딴 생각에 젖어 교차로를 지나다가 신호위반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교차로를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지나던 교인이 스윈돌 목사가 신호위반을 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스윈돌 목사 자신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미안한 마음에서 모른척하고 집으로 갔는데, 저녁에 그 교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답니다. 다음 날 점심에 만나자는 것이었습니다. 스윈돌 목사는 덜컥 약속하기는 했으나 걱정이 많이 되어 ‘피할 길’을 달라고 기도했답니다. 그리고 즉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다음 날 식당에 가보니, 예측대로 그 교인과 다른 몇몇 교인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윈돌 목사는 준비한 목걸이를 하고 들어갔습니다. 목걸이에는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글귀가 씌여 있었습니다. 이를 본 교인들이 얼마나 웃었을까요? 그때, 찰스 스윈돌 목사는 뒤로 돌아 등 뒤에 있는 부착물마저 보여주었습니다. 부착물에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씌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과 영원한 지옥 사이에 놓인 결정적인 차이점은 단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는 회개할 기회가 있는데, 영원한 지옥에서는 회개할 기회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4. 회개와 죄의 고백
누가복음 18장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무엇이 진정한 회개일까요? 진정한 회개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께서 회개를 통해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우리가 악을 행하는 것은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지 말아햐 한다면 우리는 곧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24절에서 우리의 이런 상태를 고백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참 회개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고백만 한다고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부 싸움을 하거나 교인과 다퉜을 때,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기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이 고백이 나오면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자신과 상관없이 교회에 혹은 나라에 문제가 생겼을 때, “주여, 저의 죄 때문입니다”라고 하기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우리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라고 고백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좌절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회개, 즉 죄의 자백을 막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고백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죄를 이기기 원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빌리 선디 목사님은 이렇게 외치며 살았습니다.
“나는 죄와 싸우겠다. 발이 있는 한 죄를 차버리겠고, 주먹을 가지고 있는 한 죄를 쳐버리겠고, 머리를 가지고 있는 한 죄를 받아버리겠고, 치아를 가지고 있는 한 죄를 물어뜯겠다. 내가 늙어서 주먹도 치아도 힘도 없다면 영광의 내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잇몸으로라도 죄를 이기겠다.”
정말로 처절하게 죄와 사투를 벌이지 않습니까? 이런 자세가 있는 사람은 회개할 수 있습니다.
완치가 어려운 병이 많지만 그중의 하나가 알코올 중독입니다. 일단 알코올에 중독되면 치유가 쉽지 않습니다. 알코올 중독에서 빠져나오는 치유의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자기의 모습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온전히 치유되기 전에 자신이 치유되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의 상태를 바라보고, 대면하고, 인정하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안 그런 척, 괜찮은 척해서는 치유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의 은밀한 전쟁>>이란 책을 쓴 패트릭 민즈 목사님은 자신이 싸우고 있는 죄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여 도움을 청하고 있다면,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그 문제를 기꺼이 말하려 들지 않는다면 밤새도록 가슴을 치면서 울며 금식해도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한 남자 집사님이 음란 잡지와 음란 비디오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이따금 출장을 가게 될 때면 항상 이 일로 넘어졌습니다. 그는 처절하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지켜주세요! 저를 붙들어주세요!”
하지만 결국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여 유흥가를 배회했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도무지 죄를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 집사님은 자신의 부끄러운 생활을 제게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저는 집사님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만날 때마다 손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그 후,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사님이 충동을 이기지 못하여 죄를 지으러 갈라치면, 술집 문이 닫혀 있거나 가는 도중에 교인을 만나는 등 하나님께서 죄의 길을 막으시는 것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한번은 회사에서 바이어를 접대하느라고 술집을 찾았는데, 그곳의 아가씨가 “아저씨, 예수 믿으세요!”하고 귀에 속삭이더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집사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강하게 느끼고는 그곳에서 뛰쳐나왔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집사님의 마음에 견고한 진을 치고 있던 음란죄는 사라져버렸습니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성령의 강한 역사로 회개가 일어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바로 ‘용서 구하기’입니다. 용서는 다툼이나 관계의 깨어짐과 같은 명백히 잘못된 행위가 있을 때 구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데 “당신을 미워한 것을 용서해주세요”라고 하면 그것이 도리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해야 할지, 상대방에게도 용서를 구해야 할지 기도하면서 지혜를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회개의 축복을 믿으면 자신을 회개하도록 인도해주는 사람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을 가장 귀하게 섬기는 일은 그 사람이 회개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그와 같이 서로 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알프스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13일간 방황하다가 구출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매일 열두 시간씩 걸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길을 잃은 장소를 중심으로 불과 6킬로미터 안에서만 왔다 갔다 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눈을 가리면 똑바로 걷지 못합니다. 20미터를 걸으면 약 4미터 이내의 차이가 생기며 100미터를 걸으면 결국 원을 그리면서 돌게 된다고 합니다. 이 현상을 윤형방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눈을 가리고 비교적 똑바로 걷는 방법이 있으니, 약 30보쯤 걸은 후에 잠깐 멈추었다가 새 출발하는 기분으로 다시 30보를 걸으면 된다고 합니다.
회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고 또한 기적을 안겨줄 줄 확신합니다.
Q. 야고보서 5장 16절을 읽고 초대교회 때는 왜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나타났는지 답해보십시오.
‘낙타 무릎’이라는 별명을 가진 야고보 사도는 초대교회에 임재한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가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며 야고보서를 기록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병이 낫도록 기도하기 전에 먼저 “죄를 서로 고백하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때 비로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전파된 초창기에 영적 대각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1903년에 원산에서 시작해서 1907년에 평양에서 절정에 오른 부흥운동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 대각성을 1903년 선교사였던 하디 목사(R. A. Hardie)의 회개를 시작으로 일어났습니다.
하디 목사는 당시의 다른 선교사들처럼 자기 민족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선교에 임했습니다. 그는 한국 민족을 열등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대했습니다. 그런데 사경회를 인도하는 도중 그 같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되었고, 성도들 역시 죄를 고백함으로써 영적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단순히 남을 미워하거나 질투한다든지, 남을 훼방하는 것에 대한 회개 이외에도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질이나, 살인 이 같은 죄의 고백이 있은 결과, 일본 경찰이 범임을 잡으려고 교회로 찾아오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1904년 3월에 서울 잣골교회(현, 자교교회)에서 있었던 부흥회 기간의 일들을 기록한 것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집회였다. 뿌리 깊이 박힌 죄의식이 터져나와 온갖 추악한 죄들을 고백하는 일이 일어났고 훔친 재물을 돌려주는 역사가 나타났다. 교인들 대부분은 처음으로 죄와 죄 사함에 대해 알게 되었다.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새 삶을 살게 되었으며 축복을 받게 되었다. 우리는 이 집회를 통해 성령께서 한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현재의 구원을 확신하고 증거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교회와 교인이 회개의 능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인이 죄와 세상을 이기는 가장 큰 무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축복의 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죄를 지어서 슬퍼하시기보다는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슬퍼하십니다.
회개하지 않고 지나친 것은 없으십니까?
Q. 여러분은 정말 죄 문제를 해결하기 원하십니까?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들끼리 도울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5. 회개에도 기회가 있다
베드로후서3장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회개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요나 선지자는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적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선지자라는 사명이 있는데도 애국심에 사로잡혀 이 명령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가야 했지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가 타고 가는 배에 풍랑을 일으키셨고, 결국 풍랑을 만난 원인이 요나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에 선원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졌고 하나님께서는 커다란 물고기를 보내어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물고기 배 속에 들어앉은 요나 선지자는 회개의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앗수르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요나 선지자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회개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회개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마지막 때가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동안 온전한 회개를 이루어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복을 누려야 합니다.
마귀가 루터에게 다가와서 그가 지은 모든 죄를 들추어내며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죄인이다”라고 외쳤습니다. 루터는 죄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네 죄 때문에 피를 흘렸다.”
마귀가 죄를 들추어낼 때마다 루터는 솔직히 인정하고 예수님의 피를 뿌렸습니다. 그러자 죄가 전부 사라졌습니다.
어떤 성도가 아들의 구원을 위해 기간을 정하고 마음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어머니의 권면을 뿌리치며 교회에 나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작정기도 기간 마지막 날, 상심한 성도는 무디 목사를 찾아와서 “아들을 위해 금식까지 하며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렸는데, 이렇다 할 변화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걸까요?” 라고 불평했습니다. 그러자 무디 목사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군가와 잘못된 관계를 맺은 적은 없습니까?”
그녀의 머릿속에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내는 교인이 떠올랐습니다. 결국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기도해보라는 무디 목사의 권면을 듣게 되었습니다.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자, 그녀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담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날 밤, 사랑하는 아들이 성령님의 강권하심을 받아 스스로 교회에 나오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들은 아들은 주님 앞에 나와 자신을 드리는 영광스러운 구원의 역사에 동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깨끗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통해 많은 열매를 맺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러 비유 중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농부가 되시며, 자신은 포도나무이고, 그리스도인은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지 된 그리스도인이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농부의 손길에 의해 제거되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깨끗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1~3). 열매를 맺는 가지 된 그리스도인은 회개를 이루고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깨끗해집니다. 회개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회개의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7)
윌리엄 뉴톤 블레어 선교사는 <속히 예수 믿으시기를 바라나이다.>에서, 한국의 초대교회 부흥은 진정한 회개 열풍이 교회에 불어 닥침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블레어 선교사는 교인들 가운데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고 썼습니다. 그들은 결국 무섭게 타락하여 그 도시에서 가장 사악한 사람들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 같은 사람들이 가지치기 당한 자들입니다. 즉,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회개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배 속에 있을 때 회개해야 했던 것처럼, 회개에도 기회가 있으며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을 때 축복의 길이 열립니다. 징계를 받아 바다에 던져졌던 요나가 회개함으로써 다시 선지자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때 복된 삶과 길이 열립니다.
다음 질문은 하나님과 당신의 비밀스러운 대화를 위한 것입니다.
다음 각 항목을 읽고 묵상할 때, 성령님이 깨닫게 하신 죄가 있으면 정직하게 ㅇ표 하십시오.
1. 매일 주님과 나누는 교제에 대해(개인기도, 말씀묵상, 찬양과 감사)
1)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지 못하고, 그 이름을 함부로 말하고 무시했던 일 ( )
2) 하나님을 의심하고, 교만하여 자기 계획대로 고집하고 살았던 일 ( )
3) 예수 믿기 전에, 성도를 욕하고 무시하고 핍박했던 일 ( )
4)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했던 일 ( )
5) 날마다 찬양과 기도를 드리며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한 일 ( )
6) 먼저 하나님께 충분히 기도하고 응답받지 않은 채 어떤 일을 한 일 ( )
2.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일에 대해(교회 각 부서 봉사와 충성)
1)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으나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여 외면하거나 거부했던 일 ( )
2) 하나님과 교회에서 맡은 일을 적당히 하거나 그에 대해 불성실했던 일 ( )
3) 교회 내에 시험을 일으켜 주의 종과 교회를 곤란에 빠뜨렸던 일 ( )
4) 교회의 중요한 일에 대해 소극적으로 임했거나 관심을 두지 않은 일 ( )
5) 여러 가지 핑계를 내세워 교회 집회에 참석하지 않은 일 ( )
6) 주의 일에 헌신한 사명자들이 연단 받을 때, 조롱하고 판단하며 무시했던 일 ( )
7) 몇몇 친한 사람들과만 교제하여 교회 안에 당을 만든 일 ( )
3. 가정과 가족에 대한 의무에 대해(배우자, 부모, 자녀, 친척과 맺는 관계)
1) 남편에게 순종하지 못하고,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일 ( )
2) 부모님에 대해 무관심하고 그분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일 ( )
3) 배우자의 가족에게 잘하지 못한 일 ( )
4) 말씀과 기도로 자녀들을 양육하지 않고, 믿음의 본을 보이지 못한 일 ( )
5) 자녀들에게 무정하게 대하거나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 일 ( )
6) 고의로 낙태함으로써 살인죄를 범한 일 ( )
4.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대해(원수 맺음, 다툼, 시기, 미움, 분노, 싫어함, 무정함)
1)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에도, 남을 용서하지 못한 일 ( )
2) 내 죄는 보지 못한 채 남의 죄만 크게 보고 비판하여 판단한 일 ( )
3)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바른 말씀으로 권면해주는 사람을 비판하고 원망한 일 ( )
4) 기도해야 할 대상(목사와 영적 지도자, 가족 등)을 위해 기도하지 못한 일 ( )
5)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무정하게 대하며 도움 요청을 외면한 일 ( )
6)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진심으로 돌보거나 위로하지 않은 일 ( )
7)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아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 일 ( )
8) 시기, 질투, 혈기를 내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 일 ( )
9) 불평불만을 퍼뜨리고 다른 사람의 약점을 들추어 쓴 뿌리 역할을 한 일 ( )
10) 거짓말하거나 과장하거나 꾸며서 말 한 일 ( )
11) 용서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용서하지 못한 일 ( )
5. 세상과 물질에 대한 태도에 대해(염려, 교만, 욕심, 사치, 헌금)
1) 주일에 돈 벌러 가거나 놀러가거나 세상일을 한 일 ( )
2)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리지 못한 것과 인색한 마음으로 헌금했던 일 ( )
3) 돈을 하나님보다 귀히 여기고 사랑했던 일 ( )
4) 세상 명예나 사람들의 칭찬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일 ( )
5) 하나님의 일보다 나 자신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했던 일 ( )
6) 하나님보다 내 자식, 내 혈족, 내 가족을 더 귀중히 여겼던 일 ( )
7) 공금을 유용했거나 도적질했거나 남에게 손해를 끼친 일 ( )
8) 남의 돈이나 물건들을 돌려주지 않거나 마음대로 사용한 일 ( )
9) 남의 것에 대해 욕심을 가지거나 탐심을 품었던 일 ( )
6. 은밀한 죄, 감추어진 죄에 대해(당신과 하나님만 아시는 죄)
1) 양심에 꺼리는 모든 음란한 말이나 행동을 하고 순결을 지키지 못한 일 ( )
2) 생각이나 행동으로 남편이나 아내를 속였던 일 ( )
3) 술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춤추고 노름하는 등 세상 재미를 일삼았던 일 ( )
4) 부처나 우상에게 절하거나 점치고 사주보고 부적을 붙이는 등 우상숭배한 일 ( )
7. 복음전하는 일에 대해(기회는 주어졌으나 증거 하지 못한 죄)
1) 전도할 기회가 있었으면서도 전도하지 않은 일 ( )
2) 이웃과 직장 동료를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일 ( )
3) 나라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지 못한 일 ( )
8. 기타,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시는 일들에 대해
아래 기도문을 작은 소리로 읽은 후, 자신의 기도를 계속해서 드리십시오.
저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 제게 이처럼 많은 죄가 있음을 깨닫고 참으로 놀라며 탄식하고 통곡합니다. 제가 분명히 이상과 같은 죄를 지었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죗값을 치러야 함을 인정합니다. 하나님, 이 무서운 죗값을 그냥 지고 복된 미래를 맞이할 수 없어서, 참으로 애통하는 마음으로 죄 사함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흘려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의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이제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죄를 고백하며, 이 모든 죄에서 떠나기를 소원하오니,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옵소서.
∎ 믿음 다지기
이번 단원을 예습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깨닫게 하신 내용이 무엇인지 잠잠히 묵상해보십시오. 개인적으로 여러분에게 주시는 주의 음성이라고 붙잡은 내용을 한두 가지로 정리해보십시오. 그리고 다음 질문에 답하십시오.
-예습한 내용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나 성구는 어떤 것입니까?
-위의 내용을 여러분 자신의 기도로 바꾸어 써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적용하라고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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