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
가남감리교회 제자훈련
9단원 소망으로 사는 사람
1. 죽음을 내다보는 눈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을 인식할 때, 우리의 삶이 완전히 새롭게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잔칫집보다 장례식에 가라는 이유도 장례식에 참석해 보면 깨닫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믿는 자들은 자기의 죽음을 직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죽음 자체가 소중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돈, 명예, 권력, 건강, 일 등을 꼽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일 뿐이지 결코 가장 중요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은 대부분 죽음 앞에서입니다. 죽음 앞에 섰을 때에야 나의 삶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Q. 누가복음 12장 16~20절에 나오는 부자가 어리석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죽음을 인식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완전히 새롭게 보입니다.
마산의 어느 교회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부목사로 섬긴 지 5년째 되던 해 담임목회를 나가기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등에 부스럼이 생긴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종합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니 피부암이었습니다. 그래서 담임목회는커녕 부목사직도 내려놓고 항암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치료받던 어느 날, 충북 음성에 있는 교회에서 주일예배 때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이 들어왔습니다. 그 교회를 담임하던 목사님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후임자로 친구인 이 목사를 추천했던 것입니다.
그 교회 교인들은 담임목사가 추천한 목사가 온다고 해서 잔뜩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주일이 되어 교회에 나타난 목사님의 모습을 보고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머리칼은 다 빠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암 환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일 설교 후 교인들은 새로운 담임목사를 청빙하기 위해 다시 위원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인이 오늘 설교한 목사님을 담임으로 모시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어떻게 암 환자를 담임목사로 모시자고 하느냐’며 다들 깜작 놀랐지만 그 교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예배 때, 저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이 비록 암 환자이지만 우리가 한 주 설교를 듣고 장례를 치러드리더라도 우리 교회는 복 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교우들은 어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온 교인들이 눈물로 회개하며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결국 교회는 그 목사님을 담임으로 모시기로 결정하고 청빙서를 보냈습니다. 청빙서를 받아든 목사님은 ‘암 환자인 나에게 담임목사 청빙서를 보내는 교회가 다 있다니!’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사모님과 함께 기도원으로 들어가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들은 그 교회에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처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은 암 환자인 자기를 담임목사로 청빙하겠다는 교인들의 마음이 고마워서 그 교회에 정말 훌륭한 목회자를 보내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는 과정에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 목사의 암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목사님은 자신의 병이 치유된 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교회의 청빙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목사님은 아마 그날의 설교가 자신의 마지막 설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자신이 목사로서 성도에게 전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내용을 전하고자 애썼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설교에는 그 어떤 인간적인 생각이나 계산 따위가 들어 있지 않을 것이고 순전한 복음만 담겼을 것입니다. 바로, 복음이 교인들을 그토록 감동시키지 않았을까요?
목사의 설교도 마지막 설교라고 생각할 때, 많은 영감이 있습니다. 꼭 전해야 할 말씀, 정말 중요한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Q.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데려가시는데, 여러분이 유언장을 남길 시간 밖에 없다면, 어떤 유언장을 남기시겠습니까? 한번 써 보십시오. (별도에 종이에 작성하십시오)
유언장을 쓸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두 가지라고 합니다. ‘미안하다, 용서해주세요.’와 ‘사랑한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을 때 가서야 비로소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소중한 사람을 얼마나 소홀히 하고 살았는지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그렇게 안타까워하고 고민하던 문제들은 유언장을 쓸 때 생각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결국 평소에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들에 매여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결국 죽는 존재라는 사실만 바로 알아도 인생은 달라집니다. 진짜 지혜는 죽음을 보는 순간 생깁니다. 죽음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경기도 파주 용미리와 벽제 납골당에는 필기대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유족의 애틋한 편지가 기록되어 잇는데, 편지의 일부가 ≪눈물의 편지≫라는 책으로 나왔습니다. 그 책에는 평소에 사랑하지 못했던 후회가 절절히 묻어 있습니다.
“여보, 당신이 내 곁에 없다는 것을 부인하고 또 부인하면서 당신을 부르다가 어느새 눈물이 고이곤 합니다. … 정말 외롭고 힘들 때 당신이 남긴 목소리를 들으며 펑펑 울어보지만 나, 아직도 시원하게 울어보지 못했어요. 언젠가는 목 놓아 울어보고 싶어요. 여보, 나 직장에 나가요.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잘 참아내고 있어요. 일하다가도 당신이 직장 다닐 때 어려운 사정을 왜 이해해주지 못했는지 후회해요. 눈물이 날 땐 천장을 쳐다보며 참곤 해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열심히 살 테니 걱정 마세요.”
“당신에 대한 미움 같은 것 이제는 다 없어졌어요. 당신을 미워했던 것, 하나님 앞에 모두 다 속죄하며 살아갈 거예요.”
“당신이 떠나기 전 2개월, 내가 당신에게 했던 모진 말들 때문에 지금 내 마음은 병이 들었어요. 정말로 나는 마음속 깊이 당신을 사랑했어요.”
“천국에서 당신 볼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아이들만 다 결혼시키면 당신 곁으로 가고 싶네요.”
“여보, 유치원에 들어간 동우는 요즘 들어 엄마를 더 찾는구려. 초등학교 다니는 선미는 자기 일을 스스로 하는 편인데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은 마음속에 묻어두는 것 같아. 여보, 당신이라는 존재의 의미가 이렇게 큰 줄은 미처 몰랐소.”
“여보, 나 죽으면 당신에게 가서 무릎 꿇고 빌 거야, 정말 미안해.”
“지훈아, 정말 미안하다. 너의 생전에 따뜻하게 못 해준 것이 못내 가슴에 걸리는구나. 네가 한 말, 아버지처럼 안 살겠다던 너의 그 말, 앞으로도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것 같구나.”
“아빠, 내가 정말로 아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뭔 줄 알아? 정말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더 미안해요, 한 번도 이런 말 하지 못하고 그렇게 보내드려서 너무 미안해요. 아빠 가끔 집에 오세요. 딱 한 번만 아빠 품에 안겨보고 싶어요.”
정말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을 죽음에 이르러서야 깨닫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성도는 평소에 죽음을 내다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소망의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서울대를 졸업한 28세의 청년이 암에 걸려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치료받는 1년 동안 의사와 가족은 그의 병명이 암이라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다만 몇 달을 치료하면 퇴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견딜 수 없는 통증으로 몸부림쳤습니다. 그런데도 목사가 청년에게 예수님을 전하면 비실비실 웃기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이 심해도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퇴원하면 자신이 이러이러한 일들을 할 것이라고 계획을 세우며 웃기만 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마지막에 여러분은 누구를 부르시겠습니까?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스데반은 주 예수를 불렀습니다. 전도자 무디는 “아, 아름답구나. 정말 저것이 천국이구나. 죽음이 이런 것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어. 나는 간다”라고 말했고, 최권능 목사는 “하늘나라에서 전보가 왔어. 빨리 오래. 나, 간다. 우리 아름다운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조세핀을 불렀습니다. 조세핀은 나폴레옹을 사랑하는 척하며 다른 남자를 만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을 불렀습니다. 만약 그 사실을 나폴레옹이 알았다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불가지론자입니다. 하나님, 천국, 지옥 등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는 순간에 “나는 이제 지옥으로 간다”라고 소리치고 죽었습니다.
Q. 여러분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2. 천국을 바라보는 눈
마태복음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미국의 라이언 화이트(Ryan White)라고 하는 소년이 열세 살 때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수혈이 잘못되어서 에이즈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그 사실을 알았는데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밝은 웃음을 보였고, 모두를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오히려 염려하는 부모를 위로했습니다.
이 사실이 방송에 보도된 후에는 많은 유명인사들이 방문하여 그 아이를 위로하고 선물도 주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던 레이건도, 팝 가수 마이클 잭슨도 방문했습니다. 결국 소년은 그로부터 5년을 더 살다가 18세에 죽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기독교 잡지에 실렸습니다.
아버지는 죽어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해줄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아들은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아버지는 제게 가장 소중한 선물을 주셨어요. 아버지는 제게 예수님을 알게 해주셨잖아요. 저는 예수님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인데 나는 조금 빨리 가는 것뿐이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받은 복 중에 가장 귀한 축복이 천국을 소유한 축복입니다. 성도에게 죽는 것도 복된 이유는 천국이 예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축복이 얼마나 기쁘고 귀한 것인가를 “밭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한 농부”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을 소유한 사람의 심정은 남의 밭에 가서 일해 주던 한 농부가 그 밭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하고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산 것과 같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기쁘고 만족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Q. 다음 질문을 읽고 답을 써보십시오.
1.여러분은 죽으면 천국에 갈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2.천국에 갈 확신이 있다면 밭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한 농부처럼 기쁩니까?
교인들에게 “천국 가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면 모두 “아멘.”하며 기쁘게 화답합니다.
그러나 “지금 천국 가시기 바랍니다.”하고 말하면 크게 당황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 목사가 도대체 왜 이러나?’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노골적으로 불쾌해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천국이 좋기는 한데 급히 가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돈 있고 건강하면 이 세상도 천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좁은 골목에서 노점을 하는 사람이 양지 바른 곳으로 뛰어가 서더니 음지에서 장사하는 친구를 보고 소리쳤습니다.
“여보게, 이리로 오게, 여기는 천국이야.!”
그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천국치곤 너무 초라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가 천국 상속권이 축복 중에 가장 귀한 것인 줄 모르고 그 상속권을 무시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고 천국 보화를 소유했지만, 자신이 엄청난 보화를 가졌다는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 아프리카 알제리에서 선교하는 찰스 마쉬 선교사는 현지에서 일곱 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다 살해되었습니다.
선교사는 너무나 안타까워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요한계시록14장13절 말씀으로 응답을 주셨다고 합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죽음에 대한 눈이 열렸으나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망 권세에 사로잡혀서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죽음에 대한 눈이 열린 것만으로 소망의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소망의 사람은 천국을 바라보는 눈이 열린 사람입니다.
만약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천국을 구경한다면, 이 세상은 한순간에 지옥처럼 여겨져서 잠시라도 더 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천국을 보여 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셔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함한 이 세상 모든 이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남은 일은 우리를 통해 복음이 증거 되어져서 모두가 함께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Q.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시는 것일까요?
“새(鳥) 눈으로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땅에서 보지 않고 공중에 높이 올라가서 모든 것을 살펴본다는 말입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보면, 모든 것이 땅에서 보는 것과 달라 보입니다. 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높고 굉장해 보이는 건물이나 산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가 지상을 내려다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한에서 높다고 하는 한라산도 별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천국은 높은 곳입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에서 보면 큰 집에서 사는 것, 작은 집에서 사는 것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키가 크니 작으니 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눈이 작다고 코가 납작하다고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천국에서 보면 세상에서 문제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정작 중요하지 않고, 별 가치 없는 것들이 다 문제로 여겨집니다.
얼마 전 어느 여 권사님과 인사를 하는데 무언가 달라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뭔지 쉽게 알 수 없었습니다. 눈치 챈 권사님이 수줍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 눈이 조금 이상해졌죠?”
자세히 보니 그 권사님의 눈이 평소보다 커 보였습니다. 쌍꺼풀 수술을 하면서 눈 주위를 조금 넓혀 놓았던 것입니다.
변명 삼아 하는 말이 재미있었습니다.
“다른 교우들이 저만 보면 항상 ‘눈 좀 뜨고 다녀라’하며 놀려대서요.”
저는 그 권사님에게 “쌍꺼풀이 정말 시원하게 잘 나왔네요.”하고 말했습니다. 큰 맘 먹고 한 수술인데 어떻게 싫은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제 마음은 달랐습니다. 저는 그 권사님의 눈이 작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한 우리 교회 안에서 그 권사님의 가치와 매력은 그의 눈 크기와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항상 교우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온갖 궂은일에 발 벗고 나서는 인품이야말로 모든 교우가 사랑하고 아끼는 그만의 가치이고 매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그런 가치와 매력을 소중히 여기기보다는 남들보다 작은 눈에 대해 깊은 열등감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요즘은 성형수술이 너무 보편화되다 보니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여기저기 뜯어 고치는 것이 유행이 되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잘사는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돈이 많고 좋은 직장 다니면 출세했다고, 잘 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잘 믿고, 주님 나라 위하여 사는 자를 잘 산다고 보십니다.
잘 살고 못 산 것은 천국에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안 믿어도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공한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형통은 부러워할 것이 못됩니다. 저들에게는 천국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간 사람을 잘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시민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땅 위에서 보는 것과 비행기 위에서 바라보는 것이 다르듯이, 땅에 집착하며 사는 사람과 천국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차이는 천양지차입니다.
그러기에 천국 시민권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을 향한 눈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의 실패로 부도를 내고 구속된 후 감옥에서 겪은 황당한 일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죄수 중에 교도소 밖에서 재단사를 불러다가 죄수복을 몸에 꼭 맞게 고쳐서 입는 죄수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원래 몸만 가리고 추위나 막으면 그뿐, 아무리 딱 맞게 맟춤 수선하더라도 죄수복은 죄수복일 뿐입니다. 설령 몸에 꼭 맞지 않아 불편하더라도 잠깐 입고 있다가 빨리 벗어버려야 할 옷이 죄수복 아닙니까?
그 사람의 말인즉,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감옥 바깥 세상에 대해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현재 이 감옥 안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감옥 밖에 소망을 둔 죄수들은 현재 자신들이 입고 있는 죄수복이 크든 작든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천국은 미래입니다. 미래에서 보면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
큰 집으로 이사 갈 사람은 지금 작은 집에 살아도 큰 행복을 누립니다. 큰 돈을 받을 사람은 지금 라면을 먹어도 배부릅니다. 고시 준비생은 남에게는 불쌍해 보일지 모르지만, 자기는 스스로 불쌍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미래에서 현재를 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가 천국을 보았고, 역사의 미래, 주님의 재림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다 매를 맞고 옥에 갇혔어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찬송을 부르며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3. 흔들리지 않는 소망
로마서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하신 것은 천국을 바라보는 자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여러분의 인생을 천국에서 다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받는 은총이 무엇인지, 지금 부딪힌 문제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환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에 대한 소망을 주시는 이유는 유혹과 핍박 앞에서 흔들리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간혹 우리가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앉아서 존경을 받다가 어느 날 갑자기 손목에 쇠고랑을 차고 TV에 나타나는 경우를 봅니다.
이유는 그들이 높은 자리가 제공하는 여러 가지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는 이들은 세상이 제공하는 아주 작은 유혹 앞에서도 쉽게 흔들립니다. 그들은 자기가 훗날 천국에서 자신이 행한 일들을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핍박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은 아주 작은 핍박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견디질 못합니다. 그러나 천국 소망을 품은 이들은 죽음까지 무릅쓰고 그 핍박을 견뎌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가 그랬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는 순간에 성령이 충만해져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
천국의 영광을 본 그는 순교도 감당할 힘이 생겼습니다. 이처럼 천국에 대한 확신이 세상을 이기는 힘을 줍니다. 그러므로 사명자들은 반드시 천국의 믿음을 분명히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한 형사는 주기철 목사를 고문하며 이렇게 윽박질렀습니다.
“너 때문에 모든 이들이 어려움을 겪고 교회가 불태워지는 것이 가한가? 고집 부리지 말고 무릎 꿇어 절하라! 성경에도 위에 있는 권세에 순복하라고 했다. 그런데 너는 왜 위에 있는 사람들의 명을 어기는가?”
그러자 주 목사님은 “나는 이 나라의 법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땅의 시민이면서 하늘의 시민입니다. 먼저는 만주의 주시며 만유의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했던 우상숭배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양이라도 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땅의 백성이기도 하니 당신들의 법을 어긴 대가로 나를 죽이시오. 나는 죽음으로 당신들이 만든 법의 대가를 달게 받겠소!” 라고 했다고 합니다.
Q. 지금 하나님 앞에 선다고 생각하면 두려운 것이 없습니까?
이러한 천국의 메시지는 노인들보다 청년들을 위한 메시지입니다. 소망은 ‘온전한 삶’, ‘성결한 삶’, ‘헌신의 삶’을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소망은 ‘흔들리지 않음’과 관련된 것입니다. ‘여기가 전부가 아니고, 지금이 전부가 아니니,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의 길에 굳게 서라! 사명의 길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자는 흔들립니다. 마귀 공격에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죄는 다시 돌아보기도 싫습니다. 이중적인 태도를 버리고 나눠주는 일에 힘쓰게 됩니다. 사람들을 미워하고, 원수를 맺을 이유도 자연히 사라집니다. 천국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도 탐심과 거짓으로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성도는 욕심과 거짓으로 가득한 우리나라의 앞날을 생각해야 합니다.
미국, 호주 국세청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한국 사람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가장 혐오하는 사람들로 한국 사람을 꼽았습니다. 우리나라가 구제 금융을 받았을 때에도 IMF에서는 우리나라 대통령의 사인만으로는 돈을 빌려줄 수가 없다며 당시 대통령 후보들의 사인까지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성도의 삶은 그 자체가 세상을 향한 메시지여야 합니다. “정직하게 살려다 가난하게 된다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서 부하게 살면 되지! 정직하려다가 출세를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과 명예를 누리면 되지!”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이런 자세로 살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일어섭니다.
천국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어리석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보게 되면 진짜 지혜가 생깁니다.
Q. 당신이 가지고 있는 성공적인 인생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천국을 보고 나면 성공에 대한 기준이 달라집니다. 돈 많이 벌고, 공부 많이 하고, 지위가 높아지는 세상적인 성공은 자랑할 것이 못되는 성공임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말하는 성공을 얻는 데에는 세 가지 부작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이것들을 얻기까지 죄 짓지 않고 살기가 어렵습니다.
둘째는 아주 잠깐 동안만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돈 많고 지위 높은 사람이 더 근심거리가 많습니다. 세상의 성공이 근심, 죄악, 질병, 전쟁 등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학자나 부자, 권력 잡은 자를 성공자라고 정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최후에 성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배 속에서의 열 달보다 세상에 나와서 잘 사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고, 어릴 때 잘사는 것보다 커서 잘 살아야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젊어서 잘사는 것보다 늙어서 잘 살아야 정말 잘 사는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잘 사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참된 성공입니까?
적어도 네 가지 조건이 구비될 때, 참된 성공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나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거나 대통령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면,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돈이 많든 지위가 높든, 공부를 많이 했든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면 그는 대실패자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쳤나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유익한 사람이었는가? 부모에게 자랑거리였는가? 자녀들에게 본이 되었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는가? 그렇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셋째, 후세에 복을 물려주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후손들에게 저주를 남겼다면 그는 실패자입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50년간 경제적으로 부유해졌다고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의 자연은 돌이킬 수 없이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제 발전이 과연 성공했다고만 평가받을 수 있을까요?
넷째, 자신이 복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천국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 부르실 때 천국을 간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혹은 세상에서 힘들고 고생스러웠어도 마지막에 나사로처럼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 있다면 그 사람도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아무리 호의호식했을지라도, 마지막이 지옥이라면 그는 실패자입니다.
이 네 가지 조건을 갖추는 것뿐 아니라 그 우선순위도 중요합니다.
순서가 거꾸로 되어서도 안 됩니다. 앞에서 말한 조건들이 분명히 충족되면 그때 출발하는 것입니다. 인생 재출발이 될 것입니다. 이때부터는 믿음을 사용하고 두려워할 것도 주저할 것도 없이 뛰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분명치 않아서 갈등되면 백 번이면 백 번 다 실패한다고 보아도 됩니다. 요즘 기업인, 세일즈맨, 벤처기업인은 보통 열심히 뛰는 것이 아닙니다. 사고방식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념으로 무장하고 철저한 자기 관리, 인간관계 훈련, 리더십 훈련을 합니다.
그러나 이들도 가장 중요한 궁극적인 목적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 가서야 ‘속았구나! 헛살았구나!’ 깨닫게 될 것입니다.
로마의 기독교는 지하 무덤 카타콤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무덤은 4~5층으로 되어 있는데 중간 중간에 큰 홀이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예배입니까? 그들은 수많은 시체들을 보면서 자신의 죽음도 보았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죽음과 그 너머의 천국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능력, 참 생명의 은총을 노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고 사자들의 공격 앞에서도 담대하게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 어렵고, 주께 완전히 순종하며 사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은 소망의 눈을 뜨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소망을 가지면 십자가는 영광이요 기쁨이며 자랑입니다. 십자가의 삶은 곧 소망이 넘치는 삶입니다.
천국의 안목을 가진 사람은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른 가치를 바라보며 살게 됩니다. 세상과 전혀 다른 고민을 하며 삽니다.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절제와 인내를 하며 삽니다. 세상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담대함으로 삽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며 삽니다. 이것이 천국의 소망을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못한 자의 차이입니다.
4. 다가오는 주님의 나라
마태복음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가 죽어서 가게 될 천국을 바라보는 눈을 뜨게 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다가오는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언젠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가르쳐 주신 기도 중에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의 의미를 알고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Q.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실 때 걱정하셨던 것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6~30절에서 예수님께서 걱정하셨던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성도가 ‘준비되지 않은 채’ 살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
실제로 많은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아무 준비 없이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마치 먹고 마시고, 학교 가고, 일하고, 집 사고, 차를 사고, 시집 장가를 가려고 태어난 것처럼 삽니다. 그래서 이 일로 염려하고 애쓰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삽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갈 때’가 다가옴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사람들이 저질렀던 죄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지 않고,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셨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노아 시대, 소돔과 고모라 시대보다 훨씬 많은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아나 소돔과 고모라 시대 사람들보다 더 어리석게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자녀를 키우면서 그들이 학창시절에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온갖 흉악하고 심각한 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더 큰 문제는 일상을 대하는 우리 태도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요, 보람이요, 만족이요, 염려의 대상이 되어버린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흉악한 죄를 짓지 않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에 푹 빠져 살고 있을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점을 더 중요하게 언급하셨습니다.
Q. 빌립보서 1장 21~24절을 읽고, 사도 바울에게 죽고 사는데 어떤 욕망이 더 크다고 했는지, 더 유익한 것이 무엇이라고 했는지 찾아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육신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기를 원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의 사명을 더욱 귀하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다시 말해 주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 시점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목표는 천국에 가는 것을 뛰어넘어 다가오는 주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천국만 바라보고 사는 자는 염세주의자들처럼 현실도피자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천국과 주님의 나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천국은 우리가 죽은 다음 구원받은 영혼을 위하여 예비된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나라가 망하고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영원히 왕노릇 할 곳입니다.
Q. 요한계시록 11:15은 요한계시록의 핵심 구절이며, 성경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공산주의의 창시자 마르크스는 요한계시록 11장 15절 말씀을 취하여 현 체제의 종말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반드시 망하고 공산주의는 반드시 온다”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 사상 하나로 지난 100년 동안 온 세계의 반이 붉게 물들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말하는 이상은 ‘자기가 힘닿는 대로 일하고, 필요에 따라 먹는다.’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바라봅니다. 누구는 좀 더 가지고, 누구는 덜 가지고 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생애를 바치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영원히 왕 노릇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주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하늘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주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지금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완전히 임할 것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
그러면 성경에서 약속한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입니까?
그 나라가 오면 신문, 잡지, 매스컴 등에서 보게 되는 온갖 더럽고 악한 일들이 이 지상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비인간적인 일, 음란과 방탕, 모든 슬픔, 눈물, 질병, 아픔, 싸움, 죽음이 없어지게 됩니다. 대신에 ,정의와 사랑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세상을 가리켜 송아지와 사자가 함께 뒹굴며 놀고, 어린 아이가 뱀의 굴에 손을 넣어도 아무런 해가 없는 세상이라고 묘사합니다. 모든 칼과 창은 곡괭이와 삽자루로 바뀌는 날이 옵니다. 전쟁이 필요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는 인류 역사 이래로 사람들이 도저히 꿈꾸지도, 상상하지도 못하던 찬란하고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그렇기에 이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도 전혀 아깝지 않은 나라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말년에 잠비아의 깊은 밀림 속에서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1871년 헨리 스탠리라는 탐험가가 리빙스턴을 찾아내기 위해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1년 만에 겨우 밀림 속에서 병들어 앓고 있는 리빙스턴을 만났습니다. 식료품과 의약품이 거의 다 떨어진 채 심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스탠리는 그에게 간절히 권면했습니다.
“선교사님, 아프리카의 복음사역을 위해서 30년간 헌신해오셨으니 이제 그만하시고 저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듣던 리빙스턴은 아주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게 있어서 아프리카의 선교사역은 헌신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큰 특권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이 영광스러운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심이 벅차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난 1873년 5월 1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리빙스턴은 침대 곁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깍지낀 채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으로 고요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처럼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은 사명과 헌신을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성도는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는 그 영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빠져서 세상 이익만 구하며 아등바등하며 삽니다.
어느 집사님께 “집사님의 사명에 대하여 생각해보셨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명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집사님은 좋은 직장과 직위를 가지고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이 하나님께로 온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Q. 당신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삽니까?
미래를 위하여 준비해도 궁극적으로 현재만을 위하여 사는 자가 많습니다. 공부를 해도, 돈을 벌어도 사실은 여기 이 세상에서 잘 살아 보고자 하는 마음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노아와 소돔과 고모라 시대를 통하여 이러한 삶의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당신 정도면 괜찮은 편이야. 봐, 나쁜 짓 많이 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하고 속삭이면서 우리의 경각심을 잃게 만듭니다.
우리는 기도 제목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성도의 소원은 주 예수께서 재림하시어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 다스리시는 그날이 속히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공부하고, 일하고, 돈 벌고, 숨 쉬고 사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정말 중요한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상황이 어렵고 힘들다면 “염려하지 말라”, “네게 복을 주리니”, “너와 함께 하리라” 같은 성경말씀이 마음에 절실히 와 닿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상황에만 집중하며 말씀을 적용하는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상황은 어렵지만 먼저는 어떤 말씀이든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있는 삶이란 주님의 나라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그 나라를 위해서 준비하며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나나님 나라에 대한 눈을 뜨지 못하면 영광스러운 그날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눈을 뜨는 것이야말로 참된 소망인 셈입니다.
Q. 마태복음 24장 40~46절 에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가 무엇을 하다가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고 하였습니까?
Q. 당신은 앞으로 주님의 나라에 있을 것을 위하여 어떤 것을 준비합니까? 다음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여러분은 가장 소중한 문제를 소홀히 여기며 살지는 않았습니까?(요한계시록 3장 17절)
2. 여러분은 가장 소중한 사람을 소홀히 여기며 살지는 않았습니까?(잠언 17장 1절, 19장 26절)
3. 여러분은 가장 소중한 일을 잊어버리고 살지는 않았습니까?(마태복음 28장 19~20절)
5. 소망과 사명
빌립보서 3:8~9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일제강점기 때 우리 민족의 한결같은 소망은 바로 독립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믿는 자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바로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어야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 투입된 주님의 나라의 ‘독립군’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두말할 것도 없이 그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나라를 준비하는 특권을 부여받은 자들입니다. 물론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직책은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맡은 직책과 임무가 무엇이든, 본질적으로 우리는 모두 주님 나라의 동지들입니다.
우리는 소속된 교단이나 단체에 상관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목적을 위해 부름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계 곳곳에 있는 모든 교회는 주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기 위해 세상에 투입된 독립군들이며, 우리의 동지들입니다.
우리는 “김 집사님, 박 장로님”하는 호칭과 함께 “김 동지, 박 동지”하며 부를 수 있게 된다면 이 사실은 훨씬 더 실감이 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의 눈이 뜨이면 불평불만이 사라집니다. 때때로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형편이 좋은 여건에서 사는 이가 있고 아주 어려운 여건에서 사는 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왜 나는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나요?”하며 탄식하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의 눈이 뜨이면 생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일제 강점기 말엽, 함경도 나남이라는 도시에 여자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여기저기서 밥을 빌어먹고 아이들이 돌을 던지며 놀려대도 실실 웃기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자를 정신 나간 거지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패망하고 그 도시에 소련군이 진주했을 때, 그 여자가 소련군 장교의 군복을 입고 사람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사실 그녀는 소련군이 그 도시의 상황을 정탐하기 위해 간첩으로 파견한 소련군 장교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이 정신 나간 거지 행세를 하면서 얻어낸 정보를 바탕으로 도시의 지주나 관리들을 잡아들여 인민재판에 회부했습니다. 소련군 여자 장교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거지꼴을 하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 일을 감내했던 것입니다.
소련군 장교라는 자부심 하나 가지고 거지 사명도 감당하는데 하물며 주님 나라의 영광을 본 사람이 어려운 사명이라고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저에겐 의사인 동생이 있습니다. 실제로 큰 도움을 받은 것이 없어도 의사 동생을 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찾아와서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이 이상하게 허전해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동생의 도움을 받기는커녕 도와주어야 한다는 부담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동생의 가족이 예수전도단 선교사 훈련 캠프에 참가하기 위해 떠나는 날, 동생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도대체 이 동생이 무엇을 보았기에 의사를 포기하고 선교사로 나가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길을 택했다면 선교사가 의사보다 더 좋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가오는 주님의 나라를 본 것입니다. 저는 동생을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 동생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가 주님 나라의 소망으로 인해 앞으로 만나게 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능히 이겨내게 해주십시오.”
몇 달 후 저는 미국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동생이 선교사 훈련을 받고 있는 캠프에 방문했습니다. 동생은 제수와 조카와 더불어 작은 컨테이너 박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동생 가족과 함께 비좁은 공간에서 식사를 준비해서 먹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끝낸 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습니다.
“형님, 미안해요. 이웃 숙소에서 싱크대가 고장이 났나 봐요. 여기에서는 누구든 한 가지씩 공동체를 위한 일을 해야 하는데 제가 맡은 것이 수리하는 일이에요. 지금 가봐야 할 것 같네요.”
동생은 그렇게 말하면서 몇 가지 공구를 챙겨들고 털털거리는 고물 트럭을 타고서 어디론가 떠났습니다.
저는 그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면 제 동생은 정상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는 제 동생 같은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없었다면 아마 오늘 우리는 아직도 어두움의 세력에 사로잡힌 채 허우적거리고 있을 것입니다.
단언하건대 바로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다가오는 주님 나라의 일꾼들입니다.
교회의 적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사단입니다. 그러나 너무 심한 말인지 몰라도 실제로 교인들은 자기 교회의 적이 이웃 교회라고 여기며 지냅니다. 이웃 교회가 부흥하면 기쁘고 감사하기보다 배 아파합니다. 그래서 이웃 교회보다 더 큰 교회가 되려고 경쟁심으로 전도에 열심을 냅니다. 교인들은 ‘교회’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 교회’를 자랑합니다. 이것은 대단한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를 사랑하는 연장일 뿐입니다.
미국 LA의 한 거리에 새로 개척한 작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Church On the Way'라는 오순절 계통의 이 교회는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모이지 않아 목회자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있는 거리의 다른 편에 미국에서 주일학교 교육으로 10대 교회 안에 손꼽히는 ‘The First Baptist Church'라는 대형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커다란 예배당 건물하며 교회 앞에 신호등이 네 개나 필요할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개척교회 목회자는 차를 몰고 가다가 그 교회 앞 신호등 앞에 멈춰 설 때마다 극심한 열등감에 몸서리쳤습니다.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는 기도하다가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 자기가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결코 자신의 교회만을 통해서 이루어야 하는 것이 나니라 모든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개달았습니다.
눈물로써 자신의 옹졸함을 회개한 개척교회 목회자는 그다음부터 그 교회 앞을 지날 때마다 조용히 그 교회를 축복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고, 그 교회로 들어가는 엄청난 수의 교인들로 인해 더 이상 불행한 심정을 맛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교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며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은혜의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 이 목회자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시작했습니다. ‘Church On the Way'에는 1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었는데, 아직까지 교인들이 그리 많지 않아서 그 좌석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예배를 드렸습니다. 목회자는 빈자링레 전도할 대상자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올려놓고 토요일 하루를 온종일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의 자리가 모두 차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200개의 의자를 마련하고 똑같은 기도의 행진을 이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에도 응답하셨고, 몇 년 후 수천 명의 교인들도 가득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대형교회에서 더 큰 부흥이 일어나 더 넓은 곳으로 교회를 이전하게 되어 ‘Church On the Way'가 대형교회 그 자리에 그대로 교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두 교회 모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같은 소망을 품은 두 교회 모두의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주님 나라의 확장과 완성을 위해서 우리와 교회를 부르셨습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이웃 교회를 보는 눈이 열립니다. 이웃 교회는 주의 나라를 위한 동역자입니다. 함께 부흥해야 합니다. 지역을 위하여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이웃 교회를 경쟁상대로 여기고, 지역을 위하여 교회가 연합하지 못하는 것은 주의 나라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Q. 다음 질문을 읽고 답을 써보십시오.
1. 빌립보서 3장 7~9절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인생관과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2. 사도 바울의 이런 가치관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합니까?(고린도후서 12장 2~4절)
사도 바울은 주님의 환상과 계시를 통해 삼층천(Third Heaven)에까지 이끌려갔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말들을 들었습니다.(고후 12:1~4). 그는 당시 사회의 지배계급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며,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던 엘리트였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세상에서 누릴 것이 무척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천국을 보았고 역사 종말의 비밀을 깨닫게 된 다음, 그는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그동안 자기가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빌 3:8)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이것을 아는 자는 미리 준비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인터콥 U국에 나가 있는 강요한 선교사님의 간증입니다.
제가 선교사로 나가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은 의과대학 본과 1학년 때 참석한 어느 집회였습니다. 그 집회 마지막 날에 선교사로 나갈 사람은 일어나라는 헌신 초청이 있었습니다. 저는 말씀에서 은혜도 받았지만 당연히 다 일어나야 하는 줄 알고 일어났는데, 나중에 보니 몇 명만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저보다 더 열심히 예수를 믿던 선배조차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고 너무나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 후 만남을 가질 때 선교를 위해 기도했지만 “너 그때 선교사로 헌신했잖아”라는 말은 서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금기와 같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저는 치과병원을 개업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벌 만한 때가 된 어느 날 아침,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는 말씀을 묵상하는데 마음에 질문이 주어졌습니다.
“성훈아! (그때 제 이름이 성훈이었습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니?”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때 또 질문이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니?”
저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무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때 마지막 질문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너는 왜 부자가 되기를 원하느냐?”
만약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직접 “너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부자가 되겠니, 부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천국에 가겠니”라고 물어보신다면 그 누가 “나는 천국 가는 것을 포기하고 부자가 되겠습니다”라고 대답할까요?
그 질문을 받은 저 역시 결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부자가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에 대하여 눈이 뜨이고 발의 족쇄가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마음 정리가 안 되어 고민과 갈등이 많았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분명해짐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5)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이 사람의 의지로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도 기쁨으로 따라주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부터 ‘어떻게 하면 부자가 안 될까’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U국 단기선교를 다녀오게 되었는데, 그곳으로의 부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강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바로 믿음 좋으신(?) 어머니셨습니다. 어머니는 영적 체험도 많으셨고 기도도 많이 하시고 교회 봉사도 많이 하셨지만 “차라리 돈을 많이 벌어서 헌금으로 선교해라”하고 야단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어려움 중에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키면서 어머니를 겨우 설득했습니다.
선교사로 나갔다가 5년 후 돌아와 보니 하나님께서는 아버님도 교회에 나가게 하시고, 천주교에 다니던 처가 식구들도 모두 교회에 열심히 다니게 해주셨습니다. 만약 제가 선교사로 나가지 않았다면 5년 동안 이런 영적인 변화가 우리 가정에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소망으로 말미암은 사명이 있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소망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천국이 보인다 할지라도 이곳 세상에서 사는 삶에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원하십니까? 혹시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미련을 두어 버리지 못했던 어리석은 부자 청년과 같지는 않습니까?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던 바울을 닮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 믿음 다지기
이번 단원을 예습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깨닫게 하신 내용이 무엇인지 잠잠히 묵상해보십시오. 개인적으로 여러분에게 주시는 주의 음성이라고 붙잡은 내용을 한두 가지로 정리해보십시오. 그리고 다음 질문에 답하십시오.
-예습한 내용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나 성구는 어떤 것입니까?
-위의 내용을 여러분 자신의 기도로 바꾸어 써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적용하라고 하십니까?
번호 | 제목 | 작성자 | 등록일 | 조회수 | 첨부 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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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1단원 : 십자가의 능력 | 김영돈 목사 | 2019-03-13 | 650 | |
1 | 오리엔테이션 | 김영돈 목사 | 2019-03-13 | 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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