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
가남감리교회 제자훈련
4단원 나는 죽고 예수는 살고
1. 성도가 실패하는 이유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는 3 단원을 통해 예수님은 모든 구원받은 성도 안에 성령님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계시다면,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실패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데도 우리 삶이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Q. 다음 질문을 읽고 답을 써보십시오.
1. 요한복음 2장 1~11절을 읽고, 예수님이 어디에 계셨는지 찾아보십시오. 거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2. 요한복음 21장 1~5절을 읽고, 예수님이 어디에 계셨는지 찾아보십시오. 거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옆에 서 계셔도, 슬퍼하시거나 안타까워하셔도, 가슴을 치고 계셔도 잘 알지 못합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는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데도 기쁨의 상징인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셨지만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은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함께하는 우리의 삶에도 기쁨이 사라지는 때가 있으며 무엇인가 열심히 노력하기는 하지만 실패하는 일이 생기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우리의 자아가 너무 강하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너무 강하게 살아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서도 아무런 역사도 행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사도 바울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어렵지 않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는 고백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내가 살지 않는다”고, “내가 나를 위하여 살지 않는다”고 사도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 안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힘든 길을 갔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누린 은혜의 감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은 실제로 가장 복되고 능력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고백한 이유는 바울 자신이 얼마나 죄에 오렴되어 있는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가 우리 자신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선한데 연약해서 죄를 짓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과 죄는 구별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아 그 자체가 죄 덩어리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의지, 감정, 지식을 포함한 모든 영역이 죄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결심했을 때 그대로 잘 살아집니까? 결심한 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하지만 좌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의지가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할 대상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대상을 사랑합니다. 죄를 사랑합니다.
우리의 지식도 오염되었습니다.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고 알지 않아도 될 것은 너무 많이 압니다. 남의 허물은 30년이 지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은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는, 어느 교회든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그 교회의 가장 충성스러운 교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대개 여러 해 동안 교회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바쳤습니다. 사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충성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교회는 교회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의 든든한 기둥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그들 때문에 교회 안에 온갖 시험거리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의 모든 일이 자신의 생각이나 역할 아래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역할이 무시되거나 자기 생각대로 일이 잘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껴 풍파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왜 열심 있는 교인이 시험을 일으키는 것일까요? 그것은 순종의 문제, 곧 자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열심히, 잘해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문제가 생기고 시험거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한 교회의 여선교회에서 시험거리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사정이 참으로 어이없었습니다.
주일 점심식사 준비가 시험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배추김치를 담그자는 의견과 깍두기를 담그자는 의견이 같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들로 교회 안에 시험이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도 자아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언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이것은 우울한 고백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에게 이 고백은 기쁨의 환호성이었습니다. 죽은 것이 그렇게 좋았을까요? 대답은 “예”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한 절망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욕을 해도, 꼬집어도, 송곳으로 찔러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믿음으로 살 때 불쾌해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억울해할 것도 없습니다. 칭찬을 듣는다고 교만할 것도 없고 비방을 듣는다고 실망하거나 불쾌해할 것도 없습니다.
어느 날, 성(聖) 마카리우스에게 제자가 물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말을 하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성자(聖子)는 아주 실질적으로 가르쳤습니다.
“너 오늘 밤에 저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이 나쁜 놈들아, 이 위선자들아, 이 부자 놈들아, 이 천하고 고약한 놈들아!’하고 욕이란 욕은 있는 대로 다 하고 돌아오너라.”
제자는 성자가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성자가 물었습니다.
“어떠하더냐?”
제자가 보고했습니다. “아무 반응이 없던데요?”
“그렇더냐? 그러면 내일 아침 다시 가서 이번에는 ‘아, 훌륭하고 위대한 분들이여’하고 칭찬하고 돌아오너라.”
제자는 아침이 되자 다시 묘지로 가서 성자가 시키는 대로 무덤을 향해 잔뜩 칭찬의 소리를 늘어놓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어떠하더냐?”
“역시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성자는 비로소 말했습니다.
“그게 바로 죽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초대 교회사를 돌아보면 유명한 분으로 김익두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청년 시절 손꼽히는 깡패였습니다. 시장에서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물을 떠놓고 비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김익두는 이처럼 많은 사람에게 고통과 불안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깡패 청년 김익두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고 회개한 다음에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깡패 김익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굉장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죽었다는 김익두가 버젓이 시장에 나타났습니다. 시커먼 책 하나를 들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김익두가 예수를 믿고 변화되어 목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김익두 목사님을 시험하려고 길을 지나갈 때 물통에 있는 물을 끼얹었습니다. 그러자 김익두 목사님이 물을 툭툭 털고 바라보더니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가 받았구나!”라고 말했답니다.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시험거리가 없어집니다.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축복이고 능력입니다.
돈 하나 없지만 오직 기도와 응답으로 2,000명의 고아를 먹여 살렸고, 1만 개의 고아원을 도왔던 조지 뮬러 목사에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그때 조지 뮬러 목사는 “능력이라니요? 제게는 제 자신의 죽음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나는 어떤 날 죽었습니다. 조지 뮬러에 대해서 죽고, 세상이나 친구들의 칭찬에 대해서 죽고, 책망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죽음, 이것이 조지 뮬러 목사가 가진 능력의 원천이었던 것입니다.
Q. 여러분의 삶에 문제가 많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습니까?
2. 살아있는 자아, 죽지 않은 그리스도인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많은 성도가 상처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것은 상처받기 쉬운 자아를 붙잡고 살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또 살기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것 역시 자신의 힘에 의지해서 살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자기를 믿고 산 것입니다. 자기만 믿고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기밖에는 자신을 책임질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은 슬퍼 보입니다. 자신의 계획, 꿈, 자랑이 다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죽음이 축복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죽을 때 예수님이 역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때 비로소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의 자아가 죽으면 누구보다도 우리의 가족이 그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와 자녀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죽을 때 예수님이 진정한 교회의 주인으로, 왕으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부흥하는 교회를 탐방하러 갔던 길에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Grace Community Church)를 방문하여 존 맥아더 목사를 만나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목회하시면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며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때 존 맥아더 목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내가 한 것은 다 실패였고, 예수님이 하신 것은 다 성공이었습니다.”
Q. 여러분은 ‘죽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언제 어떤 경우에 ‘죽으라’는 명령을 들었는지 써 보십시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집착과 사랑, 신뢰가 너무 강합니다. 우리에게는 선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래도 내가 괜찮은 부분이 있지’하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실패하고 맙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의지하고 높이면 반드시 넘어지고 맙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죽음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습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죽음이란 곧 모든 것의 종말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재하여 계신 성도에게 죽음은 곧 능력있는 삶의 시작을 말합니다.
어느 선교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회교권 선교, 공산권 선교가 어렵다고 말하지만 선교사가 살려고 하니 어려운 것입니다. 만일 그 나라에 들어가서 죽으려고 한다면 문은 얼마든지 열려 있습니다.”
Q. 다음 말씀을 읽고 빈칸을 채워보십시오.
너는 마음을 다하고 ( )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6장 5절)
네 마음을 다하며 ( )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누가복음 10장 27절)
신명기 6장 5절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개역한글성경은 이 부분을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0장 27절은 신명기 6장 5절을 인용한 말씀인데, 여기에서는 ‘뜻’ 또는 ‘성품’이라는 단어가 ‘목숨’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뜻(자기 의지)과 성품(성질) 그리고 목숨은 결국 같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의지나 성질을 바치는 것이 곧 목숨을 바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질을 바친 자여야 합니다.
어떤 원로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목회하면서 집을 바치는 사람, 땅, 전세금, 피를 뽑아서도 바치는 사람을 보았지만, 성질을 뽑아 바친 사람은 못 보았다.”
이 성질이 자아입니다. 이 때문에 가정과 교회에 문제가 생깁니다. 많은 성도가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해 시험에 들거나 실패하고, 많은 목회자들이 사역을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문제의 근원은 내 안에 있는 성질입니다. 자아의 문제는 의외로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그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삿21:25) 산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준은 다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이 죄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롬8:7)
이 말씀처럼 우리 생각과 소견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내 생각에 옳은 대로 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고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틀린 것이라면 쉽게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 생각에는 옳아 보이기 때문에 고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한 부부가 심각할 정도로 다퉜습니다.
중재자가 화해를 시키고 남편한테 찾아가서 그 이유를 들어보았습니다.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내가 잘못한 것이 맞았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남편 되시는 분 이야기를 들어보니 부인께서 잘못하신 것 같은데 주장을 꺾으시고 그만 화해하시지요.”
그러자 이번에는 아내가 열을 올리며 중재자에게 싸운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아내 이야기를 들고 보니 이번에는 남편이 잘못한 것 같았습니다.
결국 아무도 잘못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가 자기가 옳다고 합니다. 이는 자기 소견에서 옳은 것입니다. 싸움은 그래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갈등이 생기고 싸움이 생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편을 갈라서 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쪽 말을 들어보면 자기들 뜻대로 해야 교회가 잘된다고 합니다. 또 저쪽에 가서 들어보면 자기들 생각대로 해야 교회가 잘된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양쪽 모두 교회를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누구도 교회가 잘못되라고 싸우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들이 생각한 대로 해야만 교회가 잘된다는 그 고집에 있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이 옳다고 고집을 부리면 하나님도 못 말리시게 됩니다.
자신의 생각에 옳다고 그것이 정말 옳은 것일까요?
자신이 생각한 대로 무엇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꼭 옳은 결과를 낳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결국에 가서는 얼마나 후회스러운 일이 되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크게 유익을 준 것 한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세종대왕의 한글창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일반 백성들은 한글창제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한자에 능숙하던 지배계층 가운데에는 오히려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반대론자들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집현전의 학자 최만리는, 1444년 2월 20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는 예부터 대국 중화의 제도를 본받아 실행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와 아무 관련이 없는 새 글자를 만드는 것은 학문에도 정치에도 아무 유익함이 없는 줄로 압니다. 혹시라도 중국 측에서 시비를 걸어올까 두렵습니다. 주변국들이 제 글자를 가지고 있다 하나 그들은 모두 오랑캐 족일 뿐입니다. 우리가 중화의 은혜를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 족에 합류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더구나 이미 우리는 이두라는 문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두는 반드시 한자를 익혀야 쓸 수 있기에 오히려 학문에 도움이 됩니다. 만약 관리들이 쉽게 언문만 익히게 된다면 결국에는 한자를 아는 이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데 어찌하여 급하지도 않은 언문 익히기라는 부담을 주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 할지라도 한낱 기예에 불과 합니다. 학업에 정진하고 정신을 연마해야 할 어린 왕자들과 유생들이 시간을 허비해 기예 익히기에 몰두한다면, 이는 크나큰 국가적 손실입니다. 감히 고하오니 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50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상소문을 볼 때 그의 판단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었는지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 때는 자신의 소견에 옳다고 생각되었어도 결국 잘못된 생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습니다.
Q.여러분의 자아로 인하여 발생한 문제는 어떤 것인지 오늘 말씀에 비춰 설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이미 죽은 자로 여기라
로마서 6장 11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는 지금까지 죽지 않은 자아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 자아가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요? 많은 성도들이 “내가 죽어야지, 죽어야지”라고 말하며 죽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으려 한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자아는 앞으로 죽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이미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Q. 로마서 6장 3~6절을 읽고 다음 질문의 답을 써보십시오.
1. 우리가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로마서 6장 3~4절)
2. 그 일이 이루어진 목적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6장 6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3)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마음에 영접할 때 이미 죽었습니다. 마귀와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의 옛 자아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나는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장례식을 치르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진리이고 복음입니다. 그러나 아직 중요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이 진리를 결론으로 삼고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사도 바울이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스스로 결론 삼은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로마서 6장 3절~6절에서는 ‘우리’라고 했는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내가’라고 썼습니다. 말하자면 로마서 6장 3~6절은 복음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 라고 했습니다.
“여길지어다.”
자신을 이미 죽은 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의 복음이 자신에게 그대로 임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사망 선고를 해야 합니다. 죄의 종노릇하던 자아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 나는 예수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시고 나의 전부이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며 나아갈 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죽음이 실제가 됩니다. 그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이 되시고 주인 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8)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 복음 앞에 정직하게 서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 앞에 선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죽음으로 통과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오직 자아의 죽음으로만 통과할 수 있습니다. 자아의 죽음으로 십자가를 통화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생명이 되시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기도의 사도’라는 별명을 가진 존 하이드가 인도 선교사로 헌신하여 인도로 가는 배를 타고 갈 때였습니다. 그 순간까지 그는 뿌듯한 마음으로 자신을 대견하게 여겼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님이셨고 어머니 역시 신앙심이 깊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선교사로 헌신했고, 그것도 아주 훌륭한 선교사, 위대한 선배 선교사처럼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인도어를 열심히 공부하면서 위대한 선교사가 되는 데 장애가 될 만한 것들은 무엇이든 용인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결심했습니다.
그가 배에 올랐을 때 선실에는 아버지의 친구인 어느 목사님이 보낸 편지가 도착해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즉시 뜯어서 읽었는데, 편지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짤막한 몇 마디 말 때문에 그의 자존심은 잿더미가 되었고, 맹렬한 분노가 마음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편지에는 “사랑하는 존, 네가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너를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을 거야” 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화가 치밀어 올라 편지를 구깃구깃 구겨서 선실 바닥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분을 주체할 수 없어서 갑판 위로 올라갔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이 말은 그가 지금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갑판을 거닐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나는 선교사로 인도에 가고 있어. 그저 그런 선교사가 아니라 최고의 선교사가 되기 위해 가는 중이라고. 그렇다면 당연히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아니겠어? 그런데도 내가 성령 충만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다니, 정말 어처구니없고 주제넘은 말이잖아!”
그렇게 한동안 갑판 위를 하염없이 오락가락했습니다. 분노가 치밀어 마음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맹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아버지 친구 분을 정말 사랑했고 또 그분이 평생 신령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선실로 내려가, 구깃구깃 구겨서 던져버린 편지를 집어, 편지지를 곧게 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마음은 여전히 괴로웠지만, 그 목사님이 옳다는 것과 자신이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절망의 구렁텅이에 내려가 자신을 성령으로 채워달라고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순간 모든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자신의 실체와 그가 이기적인 야망을 품은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 같았지만 밑바닥에는 흉물스러운 자아의 추구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배가 항구에 당도하기 전에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령 충만해지겠다고 결심하고 더욱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제가 인도에서 보게 될 언어 시험에서 낙방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봉사하는 무명의 선교사가 되어도 좋으니 다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달라고 주께 간절히 구했습니다. 이 영적 몸부림은 항해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존 하이드 선교사는 믿음으로 자아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때가 바로 존 하이드 선교사가 십자가 복음 앞에 진실로 서는 순간이었고, 위대한 선교사로 태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Q. 여러분도 자아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고백해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여러분의 생명 되심을 고백해보십시오.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참고하여 별도의 용지(A4)에 써 보십시오.
① 죄의 종노릇하던 과거 자신의 모습
② 해결되지 않은 자아의 문제들(교만, 자기 의, 분노, 미움, 자기 연민 등)
③ 자아의 문제가 내 삶에 미친 영향들
④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
⑤ 예수님이 생명 되시는 새로운 삶에 대한 결단과 선포
예수님 안에서 죽음이 실제가 되면 모든 문제가 바뀝니다. 두려움, 염려, 걱정, 미움, 원망, 욕심, 조바심도 다 사라집니다. 그런 것들을 느끼는 주체인 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혈기, 욕망, 정욕 등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죽습니다. 옛 자아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이런 것을 처리할 방법은 없습니다. 자아의 죽음으로 이런 것들이 처리되면 우리 마음에는 평안과 감사, 기쁨과 사랑의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환경이 문제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언제 어디서나 기뻐하고, 감사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죽음을 경험하면 눈이 뜨입니다. 땅만 보고 살던 사람에게 천국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혼 구원의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비로소 주님이 나를 통해 일하시게 됩니다. 믿음의 역사는 바로 그때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중국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1869년 좌절과 낙심으로 선교지 중국에서 쓰러졌습니다. 몸도 지쳤지만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자책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선교사로서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삶을 추구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애쓸수록 더욱 거룩하지 못한 자신을 보게 될 뿐이었습니다. 그는 한 순간도 예수님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압감 때문에 오히려 너무 신경이 예민해져서 주위 사람들에게 더 자주 화를 냈고 말도 거칠게 하는 자신을 보고 당황했습니다. 기도하고 금식하고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의 시간을 더욱 많이 가졌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믿으려고 애썼지만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좌절감이 몰려왔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어떻게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능을 주신다.”라고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친구 매카시(Mccarthy) 선교사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믿음을 강하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믿음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신실하신 분,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 문장이 허드슨 테일러에게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허드슨 테일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이 결코 자신을 떠나지 않으시리라는 사실을 포함하여 예수님과 자신이 한 몸과 살과 뼈의 한 지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변함없이 신실하시다. 오, 거기에 안식이 있구나! 그 동안 예수님 안에서 안식하기 위해 헛되이 애써왔구나. 이제 결코 더 이상 애쓰지 않겠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거하시겠다고, 결코 나를 떠나지 않고 나를 버리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허드슨 테일러는 그 후, 더 이상 염려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 어떻게 지내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되었으며 또한 부활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중국 대륙의 복음의 씨앗이 된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태어난 것입니다.
Q 고린도전소 15장 31절에서 사도 바울은 어떻게 죽음의 삶을 살았다고 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날마다 자신을 죽은 자로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한 번쯤은 시도해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Q.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 도무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시험에서 이겼던 경험이 있습니까?
4. 나는 죽고 예수는 살고
로마서 6장 13절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저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예수님에게는 두 유형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첫째 유형은 주님의 일을 스스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고, 둘째 유형은 주님이 자신을 통해 일하시도록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첫째 유형의 제자로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들 수 있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4:2)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교회의 충성스러운 여성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충성스러운 일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교회 내에서 분열과 시험을 일으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두 사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열심히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있으나 정작 그분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열심은 있으나 주도권을 자신이 가지고 있습니다. 자아가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잘한 것은 자랑과 교만으로 나타나고 안 된 것은 불평과 낙심으로 나타납니다. 주변에는 계속되는 갈등과 다툼이 있고 시험거리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하기를 두려워하고 부담스러워하여 짐처럼 여기게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둘째 유형의 제자로는 사도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롬 15:17~18)
사도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한 일을 나타내고 드러내는 데 결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오직 예수님이 자신을 통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삶의 주도권이 예수님께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죄 사함도, 구원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이런 일들만 주님이 주도적으로 하시는 것입니까?
믿은 이후에도 역시 주도권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자신을 내어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납니다. 내가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잘되어도 교만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일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아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갈등과 분쟁도 사라집니다.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Q. 예수님이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하시고 싶어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깊이 생각하며 써보십시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실 수 있을까요? 가족 관계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향해 어떻게 나를 통해 예수님이 역사하시도록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인정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맡기고 완전히 순종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나의 의지를 버리고 주님의 의지로 행하고, 나의 감정이 아니라 주님의 감정으로 느끼고, 나의 지식과 경험을 의존하지 않고 매순간 주께 묻는 자세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고등부의 한 여학생은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릴 때부터 고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고모는 조카들을 키우느라 시집도 못 가고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았습니다. 여학생은 고모가 자기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알았지만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고모의 잔소리에 반항심이 생겼습니다. 특히 고모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자, 이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집에만 오면 숨이 막히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고 계속해서 고모와 싸웠습니다. 교회에서 기도할 때면 언제나 고모와 싸운 것 때문에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회개의 제목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학생은 “우리가 죽어야 우리 대신에 예수님이 역사하신다.”라는 설교를 듣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순간 “나 대신 예수님이 우리 고모를 만나주시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간 학생은 현관의 문고리를 잡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고모를 만나 안 싸울 자신이 없습니다. 저 대신 주님이 우리 고모를 만나주세요.”
기도를 마치고 문을 여는 순간 잔뜩 미간을 찌푸린 고모가 영락없이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너, 또 교회 갔다 오는 길이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고모 말을 이렇게 무시할 수가 있니…”
그런데 학생은 잔소리를 들으면서 전과 다른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전 같으면 대들면서 반항했을 텐데, 그날은 잔소리를 퍼붓는 고모의 얼굴에서 주름살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삶의 기쁨도 없이 조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십 수 년을 살아온 한 여인의 초라하고 지친 얼굴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학생은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소리를 질러대는 고모를 끌어안았습니다. 여학생은 깜짝 놀라는 고모에게 말했습니다.
“고모… 고모, 많이 늙었어. 우리 때문에 너무 많이 늙었어, 고모!”
고모는 예상치 못한 조카의 행동과 말 때문에 당황했지만 가슴에서 오랫동안 응어리져 있던 것이 풀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날 고모와 조카는 서로를 붙들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조카를 통해 한 많은 여인의 삶을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고모는 조카를 따라서 교회에 나왔고, 지금은 한 교회의 충성스러운 집사가 되어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여학생이 자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청함으로써 일어난 역사였습니다.
가정에서 예수님이 함께 계시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남편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아내가 죽으면 남편이 아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모가 죽으면 자식이 예수님을 만나고 자식이 죽으면 부모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따지고 보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순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순종은 자신의 힘으로 노력하는 순종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다는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순종은 자아가 죽는 순종입니다. 자아의 죽음을 인정하면 순종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당연한 것이 됩니다.
“내가 죽었다”는 것은, 나의 의지를 버리고 주님의 의지로 행하고, 나의 감정이 아니라 주님의 감정으로 느끼고, 나의 지식과 경험을 의존하지 않고 매 순간 주께 묻는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그때,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Q. 다음 질문을 읽고 답을 써보십시오
1. 로마서 6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죽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까?
2. 여러분의 삶 가운데 죽음을 받아들이고 순종했더니 오히려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신 적이 있습니까?
5. 죽음과 승리
로마서 6장18절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우리의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죄의 종노릇하던 생활을 청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을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 예수님의 소유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입니까?
어느 청년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직장 동료들이 화투를 치자고 하자 “미안하지만 나는 팔이 없어서 못합니다. 이 양손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더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감추거나 억누르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귀중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급한 마음에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들을 장롱에 집어넣고 방 안 구석구석에 몰아넣습니다. 겉으로는 정리가 잘 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말 집 안이 깨끗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저분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 뿐 깨끗해진 것은 아닙니다.
많은 성도가 이런 식으로 죄와 교만과 성질을 힘겹게 감추고 누르며 살아갑니다. 감추고 누르면서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것일 뿐 이긴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는 겸손한 척 머리를 숙이지만 속으로는 교만이 머리를 쳐듭니다. 성질을 애써 누릅니다. 속으로는 찡그리고 겉으로는 웃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은 자유와 기쁨이 아니라 또 하나의 짐이요, 스트레스입니다.
유교에서 공자는 ‘수신(修身)’을 가르쳤습니다. 계속 마음을 닦고 억제하는 것이 성공해야 성인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유교식으로 사는 성도가 많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조심하고 또 조심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적인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억누르지 않고 드러내고 또 드러냅니다.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면서도 두려워함이 없고 문제로 여기는 것 또한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진정한 자유요, 복이요, 승리입니다.
Q. 여러분은 죄와 성질을 힘써 누르고, 감추고 꾸미며 살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정말로 마음의 모든 것을 드러내며 신앙생활을 하는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 믿음 다지기
이번 단원을 예습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깨닫게 하신 내용이 무엇인지 잠잠히 묵상해보십시오. 개인적으로 여러분에게 주시는 주의 음성이라고 붙잡은 내용을 한두 가지로 정리해보십시오. 그리고 다음 질문에 답하십시오.
-예습한 내용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나 성구는 어떤 것입니까?
위의 내용을 여러분 자신의 기도로 바꾸어 써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적용하라고 하십니까?
번호 | 제목 | 작성자 | 등록일 | 조회수 | 첨부 파일 |
---|---|---|---|---|---|
13 | 12단원 : 전도자의 사명 | 김영돈 목사 | 2019-06-07 | 395 | |
12 | 11단원 :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라! | 김영돈 목사 | 2019-06-07 | 509 | |
11 | 10단원 : 사랑으로 사는 사람 | 김영돈 목사 | 2019-05-17 | 473 | |
10 | 9단원 : 소망으로 사는 사람 | 김영돈 목사 | 2019-05-17 | 562 | |
9 | 8단원 : 믿음으로 사는 사람 | 김영돈 목사 | 2019-05-17 | 495 | |
8 | 7단원 : 기도로 사는 사람 | 김영돈 목사 | 2019-04-30 | 462 | |
7 | 6단원 : 목자의 음성 | 김영돈 목사 | 2019-04-17 | 337 | |
6 | 5단원 : 성령 충만한 제자 | 김영돈 목사 | 2019-04-17 | 453 | |
5 | 4단원 : 나는 죽고 예수는 살고 | 김영돈 목사 | 2019-04-08 | 573 | |
4 | 3단원 :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 김영돈 목사 | 2019-03-20 | 918 | |
3 | 2단원 : 회개의 기쁨 | 김영돈 목사 | 2019-03-13 | 715 | |
2 | 1단원 : 십자가의 능력 | 김영돈 목사 | 2019-03-13 | 650 | |
1 | 오리엔테이션 | 김영돈 목사 | 2019-03-13 | 2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