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
가남감리교회 제자훈련
6단원 목자의 음성
1. 열심보다 중요한 순종
사무엘상 15장 23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열심은 분명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뜻과 계획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열심은 예수님의 의를 드러내기보다는 도리어 자기 의와 공적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롬10:2~3)
그렇다면 왜 열심 있는 교인이 시험을 일으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자아(자기 의)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는 예수님과 교회에 대해 충성스럽지만, 자아가 해결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Q. 누가복음 10장 38~42절에서 자아의 문제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많은 성도가 예수님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예수님과의 교제를 소홀히 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로 분주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교제는 소홀히 했습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소홀히 했을 때 그의 열심에서 드러난 것은 오히려 강한 자아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한다고 했지만 동생을 향해 불평하고 결국 예수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의 특성입니다.
Q. 사도행전 6장 1~6절에서는 자아 문제가 어떻게 그러나고 있습니까?
교회 일을 할 때 교인들이 이런저런 시험에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과 만나는 시간을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구제하는 일로 시험에 빠졌습니다. 구제 문제로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구제하는 일, 봉사하는 일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구제하는 일, 봉사하는 일에만 얽매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소홀히 하자 구제와 봉사는 곧 시험거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초대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큰 공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험을 통해 초대 교회는 더 강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일하는 것임을 깨닫고, 오히려 말씀과 기도에 전념했기 때문입니다.
Q. 역대상 13장 7~13절, 15장 2절, 15잘 12~15절을 읽고 다윗이 처음 법궤를 옮겨올 때 왜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십시오.
여호와의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오려는 다윗의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법궤를 옮기고자 하는 열심만 있었고 법궤를 옮길 때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옮길 수 있는 사람은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들로 한정되어 있었고 법궤를 운반할 때는 반드시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했습니다.(민 4:15)
그러나 다윗은 열심히 앞선 나머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방법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잘 모르고 열심만 있는 경우 오히려 큰 시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삶 속에서 주님과의 교제를 소홀히 하고 주님의 음성 듣기를 소홀히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내 안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18~20).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모든 믿는 자에게 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건강한가, 그렇지 못한가를 가름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지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는다고 가정해봅시다.
혼자 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두려움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부모 형제, 목회자, 교우들과 다 같이 간다고 하면 어떻습니까? 가볼 만하지 않을까요?
두려움과 걱정은 혼자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선교지로 혼자 떠날 때 주님은 동행하지 않으십니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어딜 가든 우리와 함께 가시고 동행하십니다. 이 사실만 분명히 깨닫는다면 아무도 함께 가지 않는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고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선교사 헌신자들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실제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채 선교지로 떠납니다. 그들은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선교지에서 아무런 위로도 힘도 얻지 못합니다.
실제로 많은 선교사와 가족이 주님의 동행하심을 깨닫지 못하여 선교 현지에서 영적 탈진의 어려움을 겪습니다. 마치 주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과 동행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쓰임 받는가는 ‘언제부터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인도함을 받을 수 있었는가’에 달려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하기에 앞서 이 훈련을 철저히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라면 우리는 종입니다.
주의 종이라 하면 주의 음성을 분명히 듣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면 종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Q.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말을 잘 듣는 자입니까, 말을 안 듣는 자입니까?
2.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
사무엘상 3장 10절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제자 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만 우리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제자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지, 영적으로 둔감하지는 않은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Q. 사무엘상 3장 1~14절을 읽고 답해 보십시오.
1. 사무엘이 어릴 때,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삼상3:1)
2. 사무엘은 어디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까? (삼상3:3)
3.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사무엘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삼상3:4~5)
4. 사무엘이 왜 그렇게 생각했다고 했습니까? (삼상3:7)
5. 사무엘은 몇 번 엘리 제사장을 찾아갔습니까? (삼상3:8)
6. 사무엘은 어떻게 하나님 음성을 분별해 들을 수 있었습니까? (삼상3:8~9)
사무엘상 3장 1~14절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건을 소개합니다. 이는 사무엘이 사무엘 된 결정적인 계기를 보여줍니다. 사무엘은 어려서 성전에서 자랐습니다.
열두 살 쯤 되는 어느 날 밤 성전에서 자는데,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것으로 생각하고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세 번이나 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세 번째 같은 일을 겪은 엘리 제사장은 그제야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에게 이제 다시 부르는 소리가 있거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말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사무엘은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으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교인들 중에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의심하는 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하나님의 음성으로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신비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요10:2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모두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 결코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해서 온전히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의 경우를 보십시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엘리 제사장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든는 일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교인은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직접 듣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어떤 권면도 받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는 마음은 좋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훈련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은 곧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 까요?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여호와의 전 법궤 앞에서 자고 있던 중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도 늘 성전 안에 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 말은 늘 교회라는 건물 안에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구원받은 성도는 그 몸이 성전입니다. 성령이 언제나 그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늘 의식하고 주목하고 귀를 기울이며 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4:30)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가르치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는 근심하시고 슬퍼하십니다. 그리고 그 근심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십니다.
Q.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듣지 못했다고 여긴 적은 없습니까? 깨달은 것이 있으면 써 보십시오.
우리 귀에는 수없는 불신의 메시지가 들려옵니다. 세상적인 말, 필요 없는 쓰레기 같은 말들이 너무 많이 들려옵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제가 듣겠습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사55: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6:63)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고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서 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우리 인생에 변화와 기적이 일어납니다. 대통령은 권세가 있어서 그 말 한마디에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움직이고 물질을 움직이고 나라 전체를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겠습니까?
100만 명의 영혼을 구원했다고 하는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 목사의 어머니 배시 여사는, 아홉 남매를 둔 과부였습니다. 그 많은 아이들을 다 기를 수 없어서 아이들을 다른 가정에 입양시키려고 했습니다.
그 사실을 눈치 챈 아이들은 울면서, 어머니에게 자신은 어떤 고생이라도 하겠으니 제발 다른 집으로 보내지 말아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렇게 매달리는 아이들을 차마 떼어 놓을 수 없어서 베시 여사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그러면 좋다.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길 뿐이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다짐을 받았으며, 밤마다 예배드릴 때 이 사실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3.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가
요한복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Q. 히브리서 1장 1~2절을 읽고 답을 써보십시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계속해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히 1:1~2) 즉, 아담이나 아브라함에게서 볼 수 있듯이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고, 희생 제사나 징조를 통해서나 선지자들을 통해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에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Q. 요한복음 14장 26절을 읽고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신다고 했는지 찾아보십시오.
요한복음 14장 26절을 보면 성령님은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성령의 음성이란 ‘생각나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지금 제 귀에 말씀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육성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특별한 체험일 뿐이고 모든 교인이 하는 일반적인 체험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육성으로 듣는다면 우리는 쉽게 교만해지거나 미혹을 받기 쉽고, 평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는 착각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마음의 생각으로 들을 때, 우리는 항상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듣고도 겸손해집니다.
Q. 사도행전 23장 1절에서 바울은 무엇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했습니까?
여러분은 ‘양심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양심의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심을 통해 우리의 죄와 불신앙과 영적인 나태에 대해 책망하십니다. 우리를 징벌과 실패에서 건져내시고자 할 때,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위험한 곳을 갈 때 소리쳐서 그 아이를 붙잡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엡 4:30)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 3:19)
뿌리 깊은 죄의 유혹에 빠진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죄를 지을 때마다 마음에서 들리는 경고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후 그의 마음에서는 유혹과 경고 사이에 무서운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의 갈등이 성령님의 경고 때문임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해서 듣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계속하여 들었기 때문에 예전처럼 죄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음란이라는 죄 때문에 파탄 난 어느 가정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책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강력하게 경고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하나님의 음성에 무릎 꿇고 복종 했을 때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이기지 못했던 죄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Q. 최근에 양심의 소리를 들은 때가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소리를 들었습니까?
성경은 성령께서 생각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을 요한복음 14장 26절을 포함한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Q. 아래에 제시된 성경구절들을 찾아 기록해 보십시오.
1. 로마서 8장 5~6절
2. 요한계시록 3장 20절
3. 히브리서 8장 10절
4. 에스겔서 36장 26절
우리는 이 성경 구절들을 통해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이 우리 마음과 생각에 역사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쉽게 표현하면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라고 말할 수 있고, 신학적인 용어로는 ‘조명(illumination)’ 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마음에 생각나는 것’을 성령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이라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생각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생각으로 말씀하시는 성령님에 대해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귀가 열릴 때 주님의 음성이 세밀한 부분까지도 들리게 됩니다.
Q. 시편 84편 5~7절을 읽고 마음의 생각으로 말씀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설명해보십시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분의 자녀에게 갈 길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Q. 빌립보서 2장 5절을 읽고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설명해 보십시오.
우리 안에는 분명히 주님이 주시는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모든 마음의 생각이 다 성령께서 주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생각 중에는 우리가 품고 붙잡아야 할 생각도 있고 버려야 할 생각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여러 종류의 생각이 있습니다. 먼저 육신의 생각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 8:7~8)
육신적인 생각도 때로는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고 자신은 실패하고 망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8장 20절을 보면 베드로가 성령을 돈으로 사려 했던 시몬에게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몬이 돈을 주고서라도 성령의 능력을 사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것이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 곧 육신의 욕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육신의 생각입니다.
Q. 마태복음 16장 23절을 읽고 베드로의 마음에 누가 역사했는지 설명해보십시오.
우리에게는 육신의 생각뿐만 아니라 사탄이 주는 생각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결코 주님께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항변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생각과 말은 주님을 위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 16:23)
사탄이 베드로의 생각에 영향을 주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보기에도 놀랄 만큼 끔찍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안다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생각이 일어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마귀가 우리의 생각을 통해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고 싶은 생각, 죽이고 싶은 생각, 슬픈 생각, 자기 연민, 우울증, 가출하고 싶은 생각, 온갖 음란한 생각 등은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을 보면 마귀는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어주었다고 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우리는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반드시 분별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생각으로 역사하는 마귀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하여 마귀에게 넘어갔습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요 13:27)
만일 마귀가 실제로 나타나서 온갖 더럽고 끔찍하고 부끄러운 일을 하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금방 긴장하고 대적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생각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그것이 마귀가 주는 것인지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그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은 조금만 신중하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도하라’, ‘전도하라’, ‘사랑하라’는 생각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요, 성령님의 생각입니다. 보통 사람은 ‘기도해야지’, ‘전도해야지’ 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지 않고 “주님이 기도하라고 하셨다”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Q. 잠언 4장 23절을 읽고 왜 마음을 지켜야 하는지를 설명해 보십시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지키는 것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마귀가 생각을 통해 역사하고, 그 생각을 자신의 생각으로 여기면 결국 마귀의 종과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으려면
시편 84편 5절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듣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성경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하실 모든 말씀을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상표를 보고 어느 나라 제품인지 아는 것처럼, 성경을 보면 이것이 성령님이 주신 마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Q.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혼은 우리 자아의 생각이요, 영은 성령의 생각이요, 관절과 골수는 육의 생각, 곧 마귀의 생각의 통로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의 생각을 찔러 쪼갭니다. 생각이 분별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생각이 성령님이 하신 말씀인지, 우리 자신의 생각인지, 마귀의 생각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23절에는 마귀가 주는 생각과 성령께서 주는 생각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심어주는 생각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생각이 떠오르면 먼저 그것이 성경적인가 아닌가를 분별해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떠오른 생각이 성경적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새벽기도를 하는데, 같은 죄 때문에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문제로 마음이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지 않을 거야.”
이렇게 용서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고민할 때, 갑자기 마음에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2절의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깨닫게 하셨고, 그 죄에서 완전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우리 생각이 주께서 주신 음성인가 아닌가를 분별해줄 뿐 아니라, 주님과의 더 깊은 대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양심을 통해 주어지는 경고와 책망 정도로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위대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양심만으로는 깊은 영적인 지식이나 사명에 대해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 자녀와 대화는 하지만, 대화의 주제는 한정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Q.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생활을 꾸준히 하십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둘째,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 선지자는 기도할 때,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시며 모든 만물과 사건과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베드로를 청하여 세례를 받고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까?
그리고 베드로는 어떻게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에게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줄 수 있었습니까? 기도 중에 지시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계획을 취소하고 유럽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에도 듣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중국의 워치만 리 목사가 병들어 하나님 앞에 고통을 호소하며 “하나님, 제 병을 고쳐주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리 목사는 “하나님, 제 병을 고쳐달라고 했는데, 왜 고쳐주시지 아니하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러면서 몸부림을 치며 하루 종일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다가 피곤하여 잠이 들었는데,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큰 바위가 앞에 나타나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리 목사는 “하나님, 이 배가 지나가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바위를 옮겨주랴? 아니면 물이 불어나 배가 지나가게 해주랴?”
그는 “물이 불어나게 해주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물이 불어나서 바위를 덮어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꿈을 꾼 후부터 워치만 리 목사는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기도하지 아니하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다고 합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로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십니다. 생각하지도 않는 기도, 믿어지지 않는 기도가 나올 때, 그것이 예언인가 살펴야 합니다. 기도 중에 주시는 생각을 기록해보는 것도 좋은 습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많은 것들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환경을 주목해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쓰면 성령님이 상황에 따라 우리에게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말씀을 주시는데, 그것을 ‘레마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오라!”고 말씀하시자 풍랑이 이는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성경에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말씀이 베드로에게는 레마의 말씀이었지만 모든 사람에게 레마의 말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환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주변 환경과 일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을 통해서 말씀해 주시기도 합니다.
19세기 말, 중국 선교사였던 엘리자벳 자일러 양은 소녀 시절에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선교사로 헌신하기 위해 아버지의 허락까지 받은 후 마지막으로 어느 선교회의 테스트를 받게 되었는데, 그만 큰 병이 들었다고 합니다.
선교회 사무실 직원들은 선교회를 찾은 자일러 양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중환자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루 뒤에 면접을 하기로 하고, 자일러 양에게 우선 좀 쉬라고 말한 후 다락방으로 인도했습니다. 그곳에서 자일러 양은 내내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저를 부르신 것이라면 저와 함께 계심을 알게 해주세요.”
다락방 문을 열자 침대와 창문이 있고, 창문 위에 조그만 액자가 하나 걸려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액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함께 가자!”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와 동행하신다는 너무나 놀라운 확인이었고 응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일러 양의 병이 나았습니다.
어거스틴이 회심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거스틴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여 고민하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깥뜰에서 아이들이 노래하는 소리 가운데, “펼쳐서 읽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지만 바깥뜰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상한 마음이 들어 집 안으로 들어와 가까이 있는 성경책을 집어서 펼쳐 읽었는데, 그 말씀이 바로 로마서 13장 11~14절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심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은 학생 시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했습니다. 고민하던 그는 어느 날 밤, 성경을 들고 숲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사실대로 고백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신뢰하라. 그리고 말씀 그대로를 선포하라.”
이때부터 그의 유명한 설교 스타일이 생겼습니다. 그는 설교를 할 때면 “성경은 말하기를…”이라고 시작했다고 합니다.
미국에 있는 어느학교 채플에서 설교자로 초청된 목사가 설교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롭(Rob)이란 대학생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놈(Norm)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놈(Norm)은 언어장애가 있어서 언제나 어눌하고 부정확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기숙사에 사는 친구들을 붙잡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전도했습니다.
그의 말에 질려버린 친구들은 누군가 ‘놈(Norm)이 온다!’는 소리를 지르면 모두 방문을 닫고 안에서 잠그고는 숨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롭(Rob)이 샤워를 하는데 갑자기 ‘놈(Norm)이 온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롭(Rob)은 온몸이 젖은 채로 타월만 간신히 두르고는 뛰어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놈(Norm)은 너무 가까이 와 있었습니다. 롭(Rob)은 급히 벽장에 들어가 숨었습니다.
터벅터벅, 놈(Norm)의 발걸음이 롬(Rob)의 방문에서 멈췄습니다. 롭(Rob)은 얼른 놈(Norm)이 지나가기만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놈(Norm)이 그냥 지나가게 해주세요.’
믿지도 않는 하나님께 처음으로 기도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롭(Rob), 바앙에 이이있어어?’라는 놈(Norm)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순간 벽장 위의 선반이 롭(Rob)의 머리 위로 떨어졌습니다.
아주 큰 소리를 내면서 놈(Norm)이 문을 열었을 때, 롭(Rob)은 젖은 몸에 타월을 두르고 양 귀에는 옷걸이가 걸린 채로 벽장 안에서 그를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가만히 보던 놈(Norm)이 입을 열었습니다.
‘롭(Rob). 너어 나아한테서 수움어 있어었던 거어야?’
롬(Rob)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롭(Rob)은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놈(Norm)을 피해서 숨었던 게 아니라 사실은 놈(Norm)의 하나님에게서 숨어 있었다는 것을….
놈(Norm)은 가만히 롭(Rob)을 보더니 다시 말했습니다.
‘그으래도 하나니임은 널 사아랑하아셔.’
그리고 그는 뒤돌아서 가만히 방을 나갔습니다.
다음 날 파티에 가서 술을 마시던 롭(Rob)은 갑자기 이런 것들이 너무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가만히 마음속으로 ‘하나님, 난 당신이 필요해요’라고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롭(Rob)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저 로버트 레코드(Robert Record) 목사입니다.
로버트 목사는 ‘너, 나한테서 숨어 있었던 거야(Were you hiding from me)?’라는 부분을 이야기할 때 잠시 울먹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가 싫어하던 놈(Norm)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Q. 여러분은 레마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과거 10년, 20년, 30년을 찬찬히 기록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건과 변화들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중요한 영적인 의미를 가지는 일들은 놓치지 말고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들었다고 생각하는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 분별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데도 하나님의 음성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들었다고 생각하는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첫째, 성경적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생각을 주시고, 어떤 말씀을 하셨다면 그것은 반드시 성경이 말하는 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주시는 말씀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성경이 말하는 것과 반대되는 말씀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들은 음성이 성경적인지 분별하기 곤란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둘째, 영적 일치를 통해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영적인 일치를 구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달라도 모두 한 성령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가족이나 교우들에게 같은 마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과 교회가 중요한 것입니다. 한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은 축복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Q. 영적 일치를 구하여 성공한 적이 있습니까? 선한 의도로 시작했으니 영적 일치를 구하지 않아 실패한 일이 있습니까?
셋째, 주의 사람들의 조언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주의 사람을 통해 주시는 말씀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하고 있다면, 그 즉시 “그것은 잘못이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어느 누구나 주위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적으로 지도하라고 세워주신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도 정말 듣겠다고 결단하지 않으면 말해주지 못합니다.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해야 하지만 최종 결단은 언제나 스스로 해야 합니다.
어느 한 사람을 하나님처럼 의지하는 것은 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인도하심을 구하는 자를 버리지 않습니다. 실수해도 회복시키시고 반드시 배우게 하십니다.
5.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마태복음26장39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데는 대략 세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이미 들었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 때문에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는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집사가 여관을 경영하면 짭짤한 수입이 있다는 말에 여관을 할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마음은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를 만날 때마다 “목사님,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라는 말을 몇 번이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미 “안 된다.” 고 말씀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 집사는 “그렇게 하라”는 말씀만 듣고 싶었기에 못 들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는 결혼 대상자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사람에게 시집가겠다고 했습니다. 결혼할 사람의 이름 첫 글자만 말씀해주어도 순종하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응답을 못 받았다면서 이것도 불순종이 문제냐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자매가 정말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시집가면 고생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딤후4:2).
하나님께서는 거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살전4: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지 말씀해주셨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
여러분은 이 말씀을 처음 들었습니까? 혹시 이런 말씀이 있는 것에 대해 충격 받았습니까? 우리는 이것이 이미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다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들은 우리가 듣고 싶은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입니다.
Q. 요한복음7장17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자신이 듣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할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순종하고자 하는 결단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한 번 들어보고 그대로 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식이면 들을 귀가 없다는 말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예” 라고 받아들이기보다는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자신의 뜻과 계획을 잘 포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해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기도는 하나님께 설득당하는 것입니다. 나를 변화시켜나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불신자와 결혼하지 마라.”
그러면 그냥 “예” 라고 받아들이면 되는데, 하나님을 설득합니다.
“전도하면 되잖아요. 그 사람 좋은 사람이에요.”
술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가 깨지잖아요. 그러면 사회생활 못해요” 라고 말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말씀하시면 그냥 “예” 라고 순종하면 되는데 “주일 예배는 1년에 쉰 두 번이나 있지만 계모임은 1년에 한 번인데...”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완고함과 고집이 귀를 막습니다. 불순종이 영적인 귀를 막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15:22~23).
여러분의 고집은 어떻습니까? 자신은 스스로를 잘 모릅니다. 집에 가서 함께 사는 배우자와 가족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보, 나 고집이 있는 것 같아?”
“당신 고집부릴 때 보면 보통이 아니지.”
이런 말을 듣는다면 그 자리에게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내 귀가 불순종으로 막혔나이다.”
그리스도인이 함께 쓸 수 없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안 돼요. 주님!”입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안돼요.” 라고 말하면 그분은 여러분의 ‘주님’ 이 아닙니다. 그분이 진정으로 여러분의 ‘주님’ 이시라면 여러분의 대답은 언제나 “예” 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언제나 “예” 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격 한 가지를 고쳐라”, “마음을 바꾸어 먹으라” 고 하셔도 거기에는 놀라운 뜻이 숨어 있습니다.
어느 날 소심하고 신경질적인 교회학교 교사인 애드 킴벌이 구둣방에서 일하는 자기 학생을 방문했습니다. 그 학생은 유난히 학력 수준이 떨어졌습니다. 킴벌은 이 아이가 부담스러웠지만, 그날은 이 학생을 찾아 심방하라는 성령님의 강권하심을 느꼈습니다. 그날 심방을 통해 그 학생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학생이 바로 100만 명의 영혼을 구원한 무디 목사였습니다.
무디 목사가 유럽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는 중에 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는데, 그 사람의 변화된 생활을 통해 그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중국과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개척 선교사의 위대한 삶을 살았던 스터드 선교사입니다.
애드 킴벌에게서 시작된 연쇄 전도운동을 통해 모다케이 함이라는 사람이 구원받아 그 역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어느 시골 교회의 부흥집회를 인도하는 중에 수줍음을 잘 타는 한 소년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는데, 그가 그 유명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입니다. 그리고 이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집회에서 맨 뒷좌석에 있던 한 사람이 결신했는데, 이 사람은 후에 미국 교도소 선교를 활발하게 행한 콜슨입니다.
둘째, 세상에 정신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전혀 듣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신을 다른 데 빼앗긴 채 살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2:2)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늘 주님을 묵상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은 한계가 있습니다. 동시에 여러 가지를 집중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주님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셔도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즘 어디에 정신 팔고 있습니까? 예수님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관심과 생각이 주님이 아닌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세상에 정신을 두고 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고인(故人)이 되신 이중표 목사님도 유학을 가지 못하신 열등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버드 대학교 채플 시간에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제 손자는 이 대학에 다닐 수 있게 해주소서.”
그러자 주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나도 이 대학 못 나왔다.”
그 한마디에 목사님은 평생의 열등감이 다 치유되었고, 다시는 학위가 문제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전에도 주님은 말씀하셨겠지만, 자신의 관심과 생각이 학위에 있으므로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니 문제가 다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Q. 다음 질문을 읽고 답을 써보십시오.
1. 마태복음6장21절에서 예수님은 우리 마음이 어디에 있다고 하셨습니까?
2. 여러분의 보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지금 어디 있을까요?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보물을 예수님께 두었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우리 안에 다른 소리를 방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계들이 요란하게 돌아가는 공장에서는 다른 사람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음성 외에 다른 소리들이 들리는데 그것을 차단하지 않고 방치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서는 다른 소리를 차단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소리를 차단해야 할까요?
첫째, 자아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지만 상황이 더 어려워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내면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순종의 결과가 겨우 이런 것이란 말인가?”
이런 소리가 내면에서부터 들리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어려워집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다다랐을 때, 뒤에서 바로의 군대가 뒤쫓아 왔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눈앞의 상황에 절망하여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출14:11~12).
바로 이것이 자아의 외침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14:13~14).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
이 말은 자아의 소리를 멈추고 가만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이 구원한 백성을 무책임하게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려워 보이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구원해내십니다. 그것을 체험하려면 상황에 따라 조급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아의 소리를 어떻게 차단해야 합니까? 4단원에서 공부한 것처럼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나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아의 죽음을 인정하면 자아의 욕구와 소리, 원망, 두려움, 미움, 조급함, 고집 등은 사라집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더 이상 ‘내가’ 문제 되지 않으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성공도 실패도 칭찬도 비난도 다 끝입니다. “안 돼요. 못해요” 도 없어집니다. 아무리 마음에 쓴 뿌리가 있고 염려와 두려움이 커도 자아가 죽으면 평안과 사랑을 갖게 됩니다.
자아가 죽음 후에 비로소 가정을 향한 주님의 마음, 가족을 향한 주님의 마음,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마음, 교우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 나라와 민족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둘째, 마귀의 소리를 차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음의 생각으로 말씀하시지만 마귀 역시 마음의 생각으로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줍니다. 생각을 분별하지 않으면 마귀에게 미혹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귀의 음성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마귀의 영적 특징을 알면 마귀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교만한 자입니다(사14:12~17). 자신을 사랑하고 드러내라는 음성을 듣습니까? 다른 사람을 짓밟고, 상처를 주면서라도 성공하라는 음성을 듣습니까? 그것은 마귀로부터 온 음성입니다. 마귀는 비판하는 자요, 참소하는 자입니다(계21:10).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듭니까? 다른 사람을 정죄하려는 마음이 듭니까? 그것도 마귀로부터 오는 생각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요, 탐내는 자입니다(요8:44). 거짓으로라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라는 음성을 듣습니까? 정직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득을 얻으라는 음성을 듣습니까? 마귀로부터 온 음성입니다. 마귀는 분열과 다툼의 영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이 공동체 안에서 분열과 다툼을 일으킨다면 그 생각은 분명히 마귀로부터 온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은 차분하고, 한결같고, 부드럽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화합하고 하나 되게 만듭니다. 그러나 마귀의 음성은 충동적이고, 산만하고, 일관성이 없습니다. 결국 분열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런 음성들이 들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영적 전쟁임을 깨닫고, 먼저 선포해야 합니다. 자아에 대해서는 죽어야 하지만, 마귀는 대적해야 합니다.
“사탄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를 꾸짖는다. 입을 다물어라. 너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결박한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4:7).
Q. 오늘 여러분에게 중요하게 적용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깨달았습니까?
∎ 믿음 다지기
이번 단원을 예습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깨닫게 하신 내용이 무엇인지 잠잠히 묵상해보십시오. 개인적으로 여러분에게 주시는 주의 음성이라고 붙잡은 내용을 한두 가지로 정리해보십시오. 그리고 다음 질문에 답하십시오.
-예습한 내용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나 성구는 어떤 것입니까?
-위의 내용을 여러분 자신의 기도로 바꾸어 써보십시오.
* 조지 뮬러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1. 자기 자신의 의지를 꺾으라.
주어진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지가 전혀 없는 상태에 이르도록 구하라. 어떤 어려운 문제이든지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뜻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 대부분 극복된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되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어느 정도 알게 된다.
2. 기분에 의지하지 마라.
기분이나 단순한 느낌에 의지하여 문제를 보지 않도록 마음을 지키라. 만약 기분에 의지한다면 크게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뜻을 구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 지어 성령의 뜻을 구하라. 성령의 감동과 말씀이 합치되어야 한다. 말씀이 없이 성령만을 구한다면 그 또한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면, 성령께서는 성경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부합되게 하실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환경을 주목하라.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환경을 주목하라. 주위 환경이나 우연하게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5. 기도하라.
이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밝혀주시기를 분명히 간구하라.
6. 기다리라.
이상과 같이했다면, 이제부터는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최대로 사용하여 판단하라. 그렇게 해서 마음이 평온해지고 또 두세 번 더 기도한 뒤에도 그 평정이 계속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믿고 순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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